어린 시절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말도 별로 없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함께하는 친구는 라디오와 만화와 클라리넷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셔서 혼자 서울에 남겨졌습니다. 초등학교 5한년 이후로 늘 혼자 밥먹고 혼자 놀다 혼자 잠들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시간이 흘러도 외로운건 매한가지였습니다.
고1 어느 일요일 아침,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봄비치고는 굵은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왜 그리도 적적하던지...
집안이 매우 종교적이어서 그때까지 술도 담배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괜스레 한 잔 마셔보고 싶어진 겁니다. 마셔본 적도 없는 술이 왜 그리 당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슈퍼로 술 사러 갔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저의 아빠가 소주 한 병하고 담배 사오래요" 말했죠.
"진로? 담배는 어떤 거?" 물으시는데, 가슴이 막 두근거려 제대로 말도 못하고 섰다가 들어 본 적있는 상표를 말했습니다.
어쨌든 소주와 담배를 사가지고 들어 오긴했는데 어떻게 마실지를 몰라 큰 컵에 반병쯤 따르고 빗소리 설글픈 창가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순간 기침이 쏟아지더니 하늘이 노래지는 겁니다.
"어른들은 이런 기분을 즐기는 건가?" 하면서도, 소주를 들이켰습니다. 그러자 어이쿠 소리가 절로 나오며 속이 뒤집힙니다.
"정말 이런 걸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까?" 생각하는데, 죽을 것같은 소주 기운이 목구멍부터 불을 지르며 위장에 도달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어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데 꼭 죽을 맛은 아니더라구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았습니다. 더욱 어지러워지며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이층에 있는 저의 방은 앞집의 이층과 2미터쯤 마주하고 있었는데, 눈물 너머로 그집 베란다를 스크린 삼아 환상이 펼쳐집니다.
"술을 마시면 천사가 보이는군. 그런데 천사는 벌거벗고 강림하시는군... "
"벌거벗고?"
갑자기 정신이 든 난 급히 내려 앉아 생각을 가다듬었습니다. 천사가 어쩐지 낯이 익은 겁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내가 본 것이 정말 천사인지 아님 다른 무엇인지 참을 수가 없이 궁금해져 빼꼼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앞집 누나가 목욕 가운을 걸치고 섰다가 눈이 마주친겁니다. 누나도 누군가 훔쳐보는 기색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었나 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고1 어느 봄날의 오후 내내 가슴을 진정시키며, 소주 기운 탓인지 뭘 본 까닭인지, 부끄러운 건지 행복한 건지, 달뜬 체 보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