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적인 밤

hansangyou(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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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y

트로트적인 밤

       한 상 유

1
오가는 빗줄기로 젖었기에
허름한 선술집을 밝히는 삼십 촉 외등아래 망설임도 잠시
포실한 온기에 이끌렸는데, 뜻밖이었다
라흐마니노프라니, 어쨌든
왼손에 기댄 그녀의 거반 빈 잔을 채우며 어렵게
말을 걸듯 서슴- 서슴-
1악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어쩔 수 없이 무너져가는 허리선과 왠지
초라해 보이는 어깨, 한때는 그
존재만으로도 유혹이었을 긴 머리카락에 끼인
핏기 잃은 손가락들의 미동 그리고
돌아앉아 있어 아름다운 눈길과 지그시 깨물고 있지 싶은
입술의 침묵을 곁눈질하며, 삼키자
앙큼스레 손톱을 세우는 첫 잔과
뜨겁게 공복을 메우는 또 한잔과 그럴 줄 알았음에도
서서히 격정으로 밀려드는 C단조의 우수

2
김이 오르는 어묵을 받쳐 들고 주인장이 돌아온다

"맛있게 드세요."
"서정적 허기를 채울만한 참이군요."
"네?..."

플루트와 클라가 피어나는 선율을 따라
피아노가 거니는 악상의 언저리에서, 아주
오랜 사랑을 놓지 못하고
에릭 칼멘은 노래한다. All by myself 라고

청춘은 멀어져갔고
전화조차 받아주는 이가 없어 홀로
세월을 넋두리하는 밤이
축축이 젖으면
체념조차 복받쳐 All by myself 라고

눅눅한 육각 성냥갑에서 몇 차례 마찰음이 인다
외등을 향한 여인의 시선 위로 연기가 오르다가 나즈막이
숨죽여 맺는 아다지오의 여운으로 흩어진다

3
절정으로 향하는 3악장의 격정에 취하면
맨바닥에서 삐걱거리는 탁자에 기댄 밤이
조금은 소란한 양철 하늘아래 반짝이는 술잔이
고운 청춘 슬어져가는군 말해주는 저
여인의 외람된 그늘조차도
황홀할 테다. 게다가
취기사이로 끼어드는 LP판의 잡음마저
언젠가 본 듯한 흑백영화의 낭만적 사건으로 나를 이끄니, 그
무채색의 공간에서 두근거리게 하는 현의 권유를 내 잔에서
비워내며 건의 긴박함에 기대어, 문득 무어라
무어라 말하고 싶었는데, 이런...

외투깃을 여민 여인이 속절없이 빗속으로 나서고
무심히 남겨진 문틈사이에서 외등은 젖어가고
일어서는 목관이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나서려다
멋쩍게 돌아서든 피아노와 관현이 다시 장조로 격앙되든, 이젠
상관없이 되어버린, 왜 하필
C단조의 라흐마니노프였는지, 지나가는 아저씨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를 흥얼거리는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트로트적인 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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