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꼽아 봐도 우리나라에 있는 명산은 거의 다 가 본 것 같습니다. 가 봤다는 말이 꼭 등반을 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 대학 국문과 교수인 친구와 늘 어울려 여행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설악산에 갈까?" 라는 것은
울산바위까지 오르자거나 천왕성폭포를 보자는 말이 아니라
"설악산 자락에서 술이나 마실까?" 하는 의미 입니다.
이 친구 관악산 밑에 살았어도 연주대 근처도 간 적이 없는 인간입니다.
오랜만에 나들이 삼아 속리산을 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산정상에 오를 생각은 아니었고, 그 유명한 정이품송도 보고 산채를 안주 삼아 막걸리나 마시자는 속셈이었기에 출근하던 복장 그대로 출발했습니다.
친구가 선생으로 있는 청주에서 하루 머물고 느긋하게 속리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름다운 천년 고찰 법주사를 돌아보고 산채를 안주로 한 잔 했습니다.
취기가 오르니 산책이나 하자며 산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문장대에 오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험하지 않은 산길을 따라 꽤 멀리까지 걸었습니다. 땀도 나고 다리도 아프니 이젠 돌아설까 하는데, 스님 한 분이 뒷짐을 지고 걸어 오십니다. 그런데 그분 전설 속 도사님처럼 축지법이라도 쓰시는지 성큼성큼 다가오시더니 바람처럼 스쳐 지나십니다.
일찍 등반을 시작하셨던 분들이 내려오시며,
"안녕하세요." 인사하십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에 쉴 만한 곳이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예. 저 모퉁이를 돌면 쉼터가 하나 있지요."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십여 분 걸릴겁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하고, 그 곳까지만 가기로 하고 다시 걷는데 구릉을 하나 넘어도 쉼터가 보이질 않습니다.
또 다른 하산객을 만나,
"안녕하세요. 쉼터가 여기서 멈니까?" 물으니,
"아니요. 저 모퉁이만 돌면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십분쯤 가시면 됩니다."
"예? 십 분이요?..."
어쩐지 미심쩍었지만 가깝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다시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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