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뭐죠?’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다음엔 무슨 질문을 할까 기다렸지만, 처리됐다는 답변을 들었다.
들어올 땐 서류, 인성, 논술, 1차 면접, 2차 면접.
질리도록 물어보더니, 나갈 땐 이유만 듣고 끝이다.
허무한 걸까 후련한 걸까.
밖에서 찬 바람을 맞으니, 저질렀다는 실감이 났다.
2018년 3월, 사표를 냈다.
시작은 불만이었다.
야근이나 주말 출근은 없었다.
대신 밤이나 주말에 할 수 밖에 없는 과제가 있었다.
입사 첫 해인 2015년에 휴가는 4일, 한달에 빨간 날은 2일이었다.
2016년, 상사가 바뀌었다.
착한 사람이었다.
사고를 치고 해맑게 웃는 모습이 아이 같았다.
마주보며 같이 웃고 싶었다.
대신 경찰관이 웃고 있었다.
‘댁이 어디세요?’
나도 웃었다.
웃을수록 빈 술병이 늘었다.
언젠가부터 술병을 비운 다음 날 생소한 경험을 했다.
어제 점심에 뭐 먹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가 통째로 사라진 느낌이었다.
하루는 한달이 됐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퇴직금을 계산했다.
웃음이 났다.
다음 날 아침, 넥타이를 맸다.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단단하게 넥타이를 맸다.
부족했다.
퇴직금이 부족 하진 않았다.
그냥,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잘하는 것도 없었다.
나 같은 놈이 뭘 할 수 있겠나 싶었다.
나가서 먹고 살 자신이 없었다.
부족한 건 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요?’
‘나를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데일 카네기가 답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라.’
스티븐 코비, 소크라테스, 공자, 맹자.
어떤 질문에도 같은 답만 반복하는, 이상한 대화가 익숙해졌다.
2016년11월부터 2017년10월까지 11개월 간 74권의 대화를 했다.
누구 하나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요?’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나를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충분했다.
답은 이미 찾았다.
시간이었다.
학창시절 나는 ‘겜돌이’였다.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와서 온게임넷을 보는게 일상이었다.
내가 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에는 스타크래프트가 한창 유행이었다.
온게임넷을 틀면 스타크래프트 중계화면만 나왔다.
전용준, 엄재경, 김태형 아재 삼인방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화면엔 ‘임진록’이 펼쳐지곤 했다.
스타는 초반 깜짝 전략으로 승부를 보는 짧은 경기도 재미있지만, 서로 기본기를 겨루는 장기 운영전이 백미다.
모든 자원을 다 쓰고, 마지막 한 덩이 미네랄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대규모 한타!
길었던 승부를 한 번의 싸움으로 끝내는 치열한 전장은 볼때마다 전율이었다.
‘이유가 뭐죠?’
‘시간을 나를 위해서 쓰려고요.’
일하기 싫어서 야근이나 주말 출근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시간을 남에게 뺏긴다는, 나만 가지고 있는 한정된 자원을 남에게 뺏긴다는 본능적인 거부감.
인생은 시간을 자원으로 하는 운영전이다.
남의 시간을 뺏기 위한 전쟁이다.
시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