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의 돌리기 경주에서의 핵심은,
이기나 지나 변함없이 당신이 쥐라는 사실이다.
-릴리 톰린(코미디언)-
#1
2016년 봄.
토요일까지 상승하다 일요일부터 급격하게 떨어져 월요일 아침에 바닥을 친다.
그리고 다시 토요일까지 상승하다 일요일부터 급격하게 떨어져 월요일 아침에 바닥을 친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줄어든 웃음과 죽은 듯 보낸 시간을 애써 외면하며, 상자 속 동료들과 통장에 늘어난 숫자로 서로를 위로하던 어느 날, 생각했다.
벗어나고 싶다.
늘어나도 턱없이 부족해 한결같이 발목을 잡는 숫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네모난 상자는 절대로, 숫자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네모난 상자가 주는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포기할 수 없었다.
비록 내 웃음이 점점 줄어들지라도.
그만큼, 숫자는 중요했다.
#2
2016년 여름.
답을 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마다 정답을 찾아가는 방법이 있다.
혼자 끙끙 앓면서 나름대로 답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 답을 찾는 사람이 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혼자서 끙끙 앓는 타입인데, 주로 책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그때도 늘 하던대로 책에서 답을 찾고 있었다.
'숫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먼저 숫자를 알아야 해'
경제학 관련 책을 읽었고, 숫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숫자를 만드는 수단을 갖춰야겠다는 것을 알았다.
숫자를 만드는 수단은 숫자 그 자체와 기업이 있었고, 그것을 가진 사람은 투자가, 사업가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업도 결국은 숫자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던가?
결국엔 숫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숫자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절망감이 들 때 다른 얘기를 하는 책을 만났다.
무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다.
최규철, 신태순 <해적들의 창업이야기>
주식, 부동산, 프랜차이즈.
모두가 숫자로 숫자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얘기할 때, 숫자 없이 숫자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얘기한 건 이 책이 유일했기에 흥미가 생겼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많은 숫자만이 숫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결론은 너무 잔인했으니까.
그래서 결심했다.
책에서 얘기하는 대로 해보자고.
#3
2016년 겨울.
마음먹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무자본 창업이란 걸 해보려고.'
'그게 뭔데?'
'말 그대로 돈 안들이고 창업하는거야. 돈 대신 아이디어를 극한까지 짜내서 비용을 줄이는거지.'
'음...말만 들어선 잘 모르겠는데, 그런 예가 있나?'
'옷 장사를 한다고 해보자.
옷을 팔려면 먼저 팔 옷을 만들어야겠지?
옷을 만들려면 원단과 디자이너, 그리고 디자이너가 일 할 공간이 있어야 해.
근데 이게 다 돈이거든. 옷이 팔릴 지 안 팔릴 지도 모르는데 돈부터 들어가잖아.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근데 이 순서를 바꾸면 어떨까?
옷을 먼저 팔고, 만드는 거야.
디자인을 사람들한테 보여주면서 먼저 팔고, 공장에 주문을 넣는거지.
순서만 바꿔도 위험부담이 확 줄잖아. 어떠냐?'
'괜찮네. 한 잔 하자.'
괜찮다. 딱 그 정도였다. 내 결심은.
괜찮은 것에 지금 가진 것을 내려놓기에 나는 용기도, 자신도,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주변에 열심히 내 결심을 얘기하고 다니며 사람들이 용기나 확신을 주길 바랐다.
'형 저 그만두고 창업할까 싶어요.'
'좋은 회사 들어가놓고 갑자기 왜?'
'무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설명생략-
'그 무자본 창업이란 게 돈 안 들이고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고?
근데 그걸 바꿔말하면 그냥 인생 거는 거잖아? 괜찮겠어?'
...어쩌면 도전할 용기보다 포기할 핑계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4
2017년 가을.
'해달씨 무슨 고민있어?'
'예? 아니요. 요즘 좋은데..'
'아 그래? 표정이 좀 어두워보여서. 신경쓰지마.'
나이가 들어서 그런건가 생각하고 싶지만, 알고 있다.
조금씩 줄어들던 웃음이 이제는 말라버렸다.
사람들이 무슨 고민있냐고 할 때마다 웃는 연습을 해보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다시 로봇처럼 일하다 보면 어느새 로봇처럼 표정이 없어진다.
조금씩 줄어든던 의욕이 이제는 말라버렸다.
개선할 점을 찾아 고치고, 새로운 것을 만들던 사람은 필요하다고 하는 것만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로봇인가?
사람이건 로봇이건, 경제학자가 와서 이 변화를 지켜봤다면 경제적이라고 짝짝 박수를 쳐줬을 것 같다.
그래, 이건 경제적인 회사 생활이다.
더 일한다고 알아주지도 않고, 월급이 늘어나지도 않으니 최소한의 일만 한다.
더 적게 일하고 같은 월급을 받으니 얼마나 경제적인가?
마치 월급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5
2018년 지금.
숫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숫자에 집중하다가 어느새 집착하고 있었다.
숫자에 집착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숫자보다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왜 월급 아까운 것은 알면서 웃음이 아까운 걸 몰랐을까.
왜 주말이 아까운 것은 알면서 평일이 아까운 걸 몰랐을까.
왜 도전에는 원래 확신이 없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리고
왜 언제든지 숫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언제든지 숫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언제든지.
숫자보다 웃음이, 시간이, 젊음이 아깝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했다면, 언제든지.
결국엔 나와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기 위함인데,
왜 지금 당장의 웃음보다 미래에 있을 지 없을 지 모르는 웃음을 더 가치있게 생각했을까.
깨닫고 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의 웃음을 잃을 자신이.
'돈이 너무 아까워서 돈 대신 시간을 투자하는 사업이 솔깃했는데, 내 시간 투자해서 월급받는 건 왜 아깝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몰라.'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고? 그거 그냥 인생을 거는 거잖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