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조선 제 15대 임금입니다. 하지만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비운의 임금이기도 합니다. 왕의 자리에서 도대체 왜 쫓겨났을까요?
광해군은 조나 종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의 칭호인 군을 씁니다. 그럼 묘호가 무엇일까요? 묘호란 왕이 죽었을 때 왕이 생존했을 당시 업적을 바탕으로 왕의 칭호를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종이란 말은 세종이 살았을 때는 쓰지 않았던 말입니다. 세종이 살았을 때는 오로지 <주상 전하>, <전하>, <상감마마> 등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이 죽으면 현재의 임금인 문종과 다른 칭호가 필요하겠지요. 둘 다 주상전하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돌아가신 왕에게는 새로운 칭호를 부여합니다. 그게 바로 묘호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등등등 이것들이 모두 묘호지요. 그런데 광해군은 이상하게 군이라는 칭호를 받았지요. 군이란 칭호는 왕의 후궁에서 낳은 왕자에게 붙이는 칭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후궁에게서 태어난 광해군일지라도 왕위를 약 15년간 유지하였으니 묘호는 받아야 되지 않을까요?
광해군의 아버지는 선조임금입니다. 임진왜란을 맞아 의주까지 몽진하며 참담함을 느꼈을 왕입니다. 그런데 선조에게는 후궁 소생의 왕자들은 있었으나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왕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조가 50대였을 때 정실 부인이었던 의인왕후께서 돌아가십니다.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적자가 없어 선조는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를 계비로 간택합니다. 지금이야 50대도 팔팔한 청춘이지만 이 당시에는 50대 정도면 이미 노인에 속했던 나이입니다. 이때 인목왕후의 나이는 19세였으며 선조의 아들이었던 광해군은 그녀보다 아홉살이나 많았습니다. 즉 어머니의 나이가 아들의 나이보다 어린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장 많이 나이 차가 나는 왕과 왕비 사이에 신통하게도 아들이 태어납니다.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적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선조는 뛸 듯이 기뻐했겠지요. 55세때 얻은 늦둥이 아들을 애지중지 하였습니다. 그 왕자는 바로 영창대군입니다. 선조의 기쁨과는 반대로 광해군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졌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나라의 위급함으로 인해 세자 자리에 오릅니다. 혹시 임금이 죽는 불상사에 대비하여 서둘러 세자 책봉을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전에는 왜 세자에 오르지 못했을까요? 선조는 언젠지 모르는 적자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자의 자리를 미루고 미뤘는데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올린 것입니다. 이 당시 사회는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 세자 자리에 있던 광해군이라 할지라도 적장자가 태어났으니 난처해질 수 밖에 없었지요. 영창대군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앉히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만약 선조가 영조처럼 오래 살았다면 영창대권이 보위에 올랐을지도 모릅니다. 영창대군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새 임금으로 한다는 교서를 발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드디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비록 후궁의 소생이었지만 광해군은 총명하고 임금의 자질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기 바빴지만 세자는 전쟁터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활동을 격려하고 세자로서 책무를 다하였습니다. 임금이 된 뒤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개간하고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하였습니다. 특산물을 바쳐야만 했던 공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쌀이나 베로 바치도록 한 대동법을 시행하였고,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 허준을 시켜 동의 보감을 완성하도록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겪는 동안 파손되었던 성곽들을 다시 고치고 무기를 정비하여 나라의 힘을 키우는데도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이렇게 피폐해진 국가의 힘을 키우려고 노력하였지만 아쉽게 인조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그렇게 나라를 위해 애쓴 임금이 쫓겨나다니 무슨 조화일까요? 광해군을 보좌했던 정치 세력은 북인이었는데 북인들은 실리를 중시하는 임금의 뜻을 잘 따랐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을 싫어했던 서인들은 유교적 윤리를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광해군이 저지른 유교적 윤리를 그냥 보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첫번째로 서인이 지적한 것은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그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어머니였던 임해군도 죽인 것도 그들이 지적하였습니다. 두번째로 서인들이 지적한 것은 중립외교 정책이었습니다. 중립외교란 어느 나라에도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외교 정책입니다. 당시 중국은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와 만주에서 힘을 길러 점차 중국 본토로 진출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여진족의 후금이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점차 힘을 키우고 있는 후금을 어떻게 하든 정벌을 해야 명나라의 위협 요소를 없앨 수 있었지요. 하지만 명나라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후금을 칠 수 없으니 조선에게 함께 후금을 치자고 요구를 합니다.
"너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우리의 은덕을 입었으니, 이번에는 그 은덕을 갚으라!"
광해군은 난감합니다. 지금 조선의 상황도 좋지 못하고 지금 온 힘을 다해 전후 복구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명의 어려운 요구를 들어주기 참 힘들었던 거지요. 그렇다고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신하들은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았으니 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광해군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어보고 전쟁이 얼마나 백성들의 생활을 처참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명나라가 우리를 도와줬다고 해도 또다시 우리 백성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이지요. 또 후금의 군사력은 지금 명나라와는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데 괜히 후금에게 대들었다가는 큰 후환이 있을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외교 정세에 비교적 밝았던 광해군은 고민고민 하다가 좋은 꾀를 생각해 냅니다. 강홍립을 몰래 불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명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후금과 싸울 의도가 전혀 없다.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때를 봐서 후금과 적당히 타협하거라." 즉 원병을 보냈으니 명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고, 후금과 전격적으로 싸우지 않으니 후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당시 우리 나라 상황으로서는 매우 적절한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들은 의리없고 대의 명분없는 정책이라고 맹비난을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배신한 정책이고 선비로서 있을 수 없는 전략과 전술이라고 서인들은 매일같이 분을 삭입니다. 그러다가 비밀리에 쿠데타를 통해 광해군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입니다.
서인들이 주도했던 인조 반정은 곧바로 인목대비에게로 그 소식이 전해집니다. 인목대비는 그 동안의 치욕적인 생활과 영창대군을 생각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습니다. 반정 성공 후 인목대비 앞에 불려가서 꿇여앉힌 광해군은 인목대비가 준 종이를 펼쳐듭니다. 거기에는 인목대비가 쓴 광해군의 죄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인목대비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소리를 칩니다.
"네놈의 죄가 무엇이더냐. 거기에 쓰여져 있으니 크게 소리쳐 읽어라!"
광해군은 참담한 목소리로 그 종이의 글자를 읽어내려갑니다. 인목대비는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하고 상궁들의 부축을 받고 내실로 들어갑니다. 이제 광해군은 왕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아마 후금(청)과 관계가 좋았던 광해군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겠지요. 실제로 정묘호란 때에 왜 광해군을 폐위시켰느냐고 청에서 거론하였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강화도에 귀양가게 됩니다. 폐세자 질은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잡혀서 폐세자빈은 자살을 하고, 폐세자를 사형시키라는 왕명이 내려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 질긴 목숨을 이어갑니다. 왕위에 있으며 천하를 호령하던 호걸 군주가 유배지에서 처량하게 생활하고 그것도 모자라 광해군을 수발하는 상궁이나 포졸들이 영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욕을 받습니다. 그런 모욕적인 생활을 참아가며 강화도에서 제주로 이배되었다가 한 많은 삶을 마쳤습니다.
만약 광해군이 인조반정을 잘 진압하였다면 어떠했을까요? 원래 인조반정은 초반에 진압이 가능하였던 정변이었습니다. 이이반이라는 사람이 정변 사실을 미리 고변하여 사전에 발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변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이려고 하였으나 후궁과 연회를 벌리던 광해군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이반의 고변으로 일이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 반정세력은 예정대로 반정을 추진하였습니다. 반정 세력들이 쉽게 궁궐로 들어오자 광해군은 의관이었던 안국신의 집으로 몸을 피합니다. 하지만 곧 잡힙니다. 광해군은 인조 반정 이후에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정책을 씁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우리나라를 전쟁터로 몰아넣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인조 반정을 초반에 진압하였다면 광해군이 계속 집권하며 조선은 후금의 침입을 받지 않고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백성들의 삶은 편안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국제 정세를 바르게 읽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쟁이 없는 백성들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한 광해군. 역사는 그렇게 아쉬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이건 오로지 저의 생각도 되지만 다른 분들의 생각도 이러합니다. 광해군을 비판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