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사진을 보다가 워털루 전투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나폴레옹 이미지와 무관합니다.
나폴레옹 천하를 끝낸 워털루 전투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후 1814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의 연합군에게 파리를 점령당 한 후 퇴위되어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프랑스는 루이 18세가 즉위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하지만 무능한 루이 18세를 원망하고 나폴레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 프랑스로 다시 들어와 권력을 잡았다.
유럽의 각 국들은 초 긴장상태가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나폴레옹을 유럽 각국은 예의주시하였다.
유럽 각국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에 맞섰다.
1815년 나폴레옹은 동맹국을 초전에 박살내고자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로 결심했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 근처 – 라 벨르 알리앙스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이 지휘하는12만 5000명
영국, 네덜란드 등 연합군은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9만 5,000명.
블뤼허 원수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45,000명이 연합군을 돕기 위해 워털루로 진격중 이었고, 이들을 막기 위해 프랑스 그루시 원수가 지휘하는 3만명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웰링턴 장군의 전술은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자는 것이었고,
나폴레옹군은 프로이센군이 도착하기 전에 승리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속전속결로 가야 하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나폴레옹이 머뭇거렸다.
여기에는 2가지 설이 있는데
첫제, 전날 비가 많이 와서 포를 땅에 고정시기기 위해 땅이 굳기를 기다렸다는 설
둘째, 지병인 나폴레옹의 극심한 위경련이 재발하였다는 설 등이 있는데
하여간 아침 8시에 공격해야 했는데 11시가 넘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투도 대부분 미셀 네 원수가 지휘하였다.
프랑스군은 웰링턴의 중앙 병력을 유인하기 위해 우구몽을 집중 공격하기로 한다.
하지만 미셀 네는 병력을 조금씩 내보내다가 시간만 끌다 함락을 못하고,
뒤늦게 상대 중앙에 포병 공격을 뒤늦게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포병의 집중 사격을 통해 적 보병의 밀집대형을 와해시키고
그때 보병이 출동하여 적을 섬멸하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 전술에 말려들지 않았다.
병력을 횡대로 정렬시켰다가 프랑스군의 포공격이 시작되면
산등성이 너머로 보병대를 대피시키며 포격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참다못한 프랑스군 보병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지만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실패하였다.
오후 1시경 미셀 네는 직속기병과 근위기병까지 더해 2만명의 군사들에게 일제돌격을 명하였다. 보병의 도움 없이 기병으로 적진을 공격하는 다소 무리한 전략에 영국군은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이 전술에 대해 나폴레옹은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왜냐하면 보병진에 대한 기병 단독 돌격은 말이 본능적으로 방진의 총검을 두려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효율적인 전술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미셀 네는 기병과 보병의 연합공격으로 연합군의 전위를 무너뜨렸다.
때마침 프랑스 보병사단도 적진 침투에 성공하여 승기를 잡았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미셀 네는 증원군을 요청한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예비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워털루를 향해 달려오던 프로이센 군을 막으려 군대를 이중화 시킨 상태이다.
즉 나폴레옹에게는 황제 근위대밖에 없어 미셀 네의 요청을 받아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오래 끌어지자
나폴레옹은 불패 신화의 황제근위대를 오후 6시에 투입하여 승부수를 던진다.
나폴레옹의 근위대는 연합군 보병사단과 격전 끝에 능선을 확보할 순간,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공세에 의해 점점 밀린다.
웰링턴 장군은 기세를 몰아 기병대까지 출병시켰다.
이런 효과적인 웰링턴 장군의 전술 앞에
불패를 자랑하던 나폴레옹의 황제근위대도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사실 나폴레옹의 승부수는 2가지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 프로이센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웰링턴의 중앙을 파괴한다.
- 프로이센 본대가 도착한다 해도 그루시군이 먼저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예상 다 빗나간다.
결정적인 순간 등장한 군대는 그루시 군이 아닌 프로이센 군대였다.
그때 그루시는 엉뚱한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루시군을 불러들이기 위해 참모장 술트 원수에게 전령을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술트 원수는 전령을 달랑 1명만 보내는 실수를 하여 패배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결국 프랑스군은 패배하고 나폴레옹은 몰락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어 영군군의 감시를 받다가 1821년 세상을 떠난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 전투에 대해 많은 자료가 남아있고 연구물도 많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