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본 TV 드라마에 대한 인상을 기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몸 담았던 동아리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인데, 그때 기록을 해놓지 않았으면 이후에는 돌이켜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때의 기록들을 다시 정리해서 공유해보겠습니다. 의외의 기억들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니, 가장 먼저 기록한 드라마는 '천사의 선택'이란 1989년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입니다. 황인뢰 연출, 주찬옥 극본의 작품이고, 배우 문성근의 첫 TV 드라마였죠. 2001년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이 드라마가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던 이유는 탄광촌의 풍경, 그리고 배우 진영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사의 선택'은 원작 소설이 있습니다. A. J. 크로닌의 '성채'란 작품입니다. 가난하지만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충실한 재능있는 청년 의사 앤드루 맨슨이무지, 탐욕, 추악함으로 꽉찬 현실에 직면하여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성장과정을 그린 교양소설 입니다. '하얀거탑' 같은 드라마를 예로 들면 극중 최도영(이선균)이 장준혁(김명민)이 되어가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천사의 선택'은 지금의 드라마와 견주어 보면 매우 느릿한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더딘 걸음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표정을 남겨준 것 같습니다. 탄광촌의 표정, 개업한 병원 진료실에 앉아있던 문성근의 표정, 그리고 가장 깊이 남아있는 표정은 진영미의 표정입니다. 진영미는 이후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도 출연했죠.
드라마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큰아버지댁에서 살게 됩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같은 반에 좋아하는 여자친구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엄마가 주워와 입힌 여자아이 옷 때문에 낭패를 보고, 큰엄마를 따라 들어간 여탕에서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아이는 별 탈 없이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꿈인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처음 의사가 되었을때 남자는 출세가도를 접고 탄광촌에 들어가 그 동네의 주민들을 진료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 어울리면서 지내지만, 남자를 연모한 10대 소녀의 치기어린 애정으로 그는 주민들과 갈등을 갖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를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네 분교에 있는 미모의 여선생이죠. 갈등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두사람의 행복은 한동안 지속되지만, 그녀의 유산.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한 불임을 겪개 됩니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의사로서의 편한 길을 가게 됩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개인병원을 차린 그는 조금씩 변해 갑니다. 예전에 순수했던 의사로서의 마음은 줄어들고, 명예와 허세에 눈뜨게 되죠. 그로 인해 또 한번의 갈등을 겪게 되고 뭔가를 다시 깨닫게 될 무렵 그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게 됩니다. (제가 기억한 이 내용이 정확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탄광촌에서의 생활입니다. 마냥 푸르게 보이지만은 않지만 전체적으로 뭔가 기분좋게 젖어 있는 듯한 탄광촌의 풍경은 천사처럼 순수하기 그지 없던 주인공의 심정이 그대로 녹아들어간 듯 합니다. 또 이야기의 흐름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이 그곳에서 펼쳐집니다. 여교사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보는 사람들에게도 흐믓함을 주기도 했죠. 드라마 전체에서 최고의 명장면이 이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어릴적 첫사랑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끌리는 걸 느끼게 되지만, 이젠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여자에게 상처를 갖게 되고 괴로워하던 도중에 여교사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 찾아갑니다. 마당으로 나온 두 사람은 아무말없이 마주보고 서있습니다. 그는 다가가 그녀를 조심히 안습니다. 카메라는 이제까지와의 드라마같이 그들의 모습을 풀샷으로 기쁨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두사람의 얼굴은 가린채 상반신만을 보면서 여자의 가슴에 달린 브롯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그녀에게 선물해준 브롯지. 그 브롯지가 햇빛을 받아 빤짝이는 모습만을 비추고 있죠. 욕심내서 많은 감정을 전해주려 하지않는 소박한 연출 태도가 이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2001년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기록할 당시에 관련 뒷조사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배우 문성근이 연극 '한씨 연대기'에서 TV로 건너오며 처음 찍은 작품이었습니다. 문성근의 아역을 연기한 배우는 '태조왕건'에서 눈알을 씹어먹는 금강을 연기한 전현이었고, 그의 형을 연기한 사람은 김명수란 배우였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는 신애라도 출연했습니다. 극중 문성근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같은 반 친구인데,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를 봤을 때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누나와 매일 함께 봤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라도 케이블TV에서 재방영을 해준다면 꼭 다시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드라마에 대한 제 기억도 함께 재구성되겠지만, 미처 기억하지 못한 어린시절도 함께 떠오를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