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unhaesarang입니다.
오늘 이야기 할 인물은 사육신의 한명으로 알려진 성삼문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의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는 단연 한글 창제입니다.
한글 창제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곳은 집현전이었는데, 집현전은 세종 이전에 있던 기관이었습니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대폭 확대해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발달했습니다.
집현전에는 20여 명의 학사들이 있었는데 그중 훈민정음을 완성하기까지 주도적으로 이 작업에 착수한 분이 성삼문학사였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은 왕과 토론을 많이 벌였고, 세종은 학사들을 많이 우대했습니다.
성삼문은 1438년 21세의 나이에 집현전 학사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정인지. 최항. 신숙주. 박팽년. 이개와 함께 한글 창제 작업에 합류했습니다.
1446년 9월 29일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했는데, 사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만들어졌습니다.
훈민정음 반포가 늦어진 이유는 유학자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유학자들은 한자 이외의 글자는 오랑캐의 글자라며 반대하였습니다.
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과 20여 명의 학사들은 훈민정음 창제에 끝까지 추진했습니다.
세종은 한자가 어려워 백성이 글을 배우지 못하는 것에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결국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말', 훈민정음이 탄생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한글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늘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한글 창제에 큰 기여를 한 성삼문은 오늘날 사육신의 한 명으로 더 많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1453년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 일부 대신들이 왕권을 무력화시킨다는 이유 하에 반란을 일으켜 성공을 하였고 2년 후에는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7대 세조가 되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지만 실패했고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조가 직접 성삼문을 심문했는데,하늘 아래에 두 명의 임금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절개와 지조가 있었던 성삼문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성삼문과 함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훗날 사육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학사 동료이자 친구인 신숙주가 성삼문 심문 당시 세조의 옆에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신숙주는 세조의 편에 서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 사육신 성삼문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변절자로 알려지는 신숙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