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unhaesarang입니다.
오늘 이야기 할 인물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성군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늘 자식처럼 생각했고,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인 훈민정음도 만들었습니다.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해서 측우기, 해시계 등 과학 발명품들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출발은 불안했습니다.
아버지 태종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세종은 22세에 왕이 되었지만 태종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군사 문제와 국가 중대사를 자신과 상의한다는 조건 하에 왕위를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대마도 정벌 또한 태종 이방원의 뜻이었습니다.
세종이 즉위한 해, 대마도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왜구들이 한반도 해안가를 노략질하기 시작하자 1419년 6월 이종무를 총사령관인 삼군도제찰사에 임명을 합니다.
이종무는 227척의 병선에 1만 7천여 명의 병사를 태우고 대마도로 향해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대마도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낸 후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냈습니다.
14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일본에 대해 포용 정책을 펼칩니다.
내이포(진해), 부산포(부산), 염포(울산) 등 삼포를 개방해 일본과의 무역을 허용했습니다.
그 이후 노략질하는 왜구가 많이 줄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외교 정책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명에 대해서는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받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명에 대한 사대 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 여진족에 대해서는 때로는 토벌하고, 또 때로는 회유정책도 펼쳤습니다.
그 예로 대마도를 토벌했다가 삼포를 개항하기도 했습니다.
4군 6진을 개척한 것은 토벌작전이었고 이를 교린정책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대교린 정책이 조선의 외교 방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독재자인 아버지 태종과 크게 달랐습니다.
유교와 학문에 입각한 통치를 펼칩니다.
자신이 유학, 천문학, 의학, 음악 등 모든 분야에 전문가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그래서 신하들과의 토론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많은 책을 펴내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농법을 연구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 쓴 [농사직설]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백성이 쉽게 약재를 골라 쓸 수 있도록 정리한 [향약집성방]이라는 책도 그리고 최대의 의학사전인 [의방유취]라는 책도 출간했습니다.
유교 윤리에도 신경을 써 충신과 효자, 열녀 이야기를 담은 [삼강행실도]란 책도 출간을 하였고 [국조오례의]라는 예법과 절차를 정리한 책도 쓰도록 했는데 이 책은 성종 때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위대한 성군인 세종대왕은 어릴 적 성품이 매우 어질었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대단했습니다.
결국 그런 마음이 우리의 한글인 훈민정음이 탄생하지 않았나 봅니다.
아버지 태종과 달리 신하들을 아꼈고 모든 문제를 신하들과 상의하며 결정했습니다.
물론 세종이 뛰어난 군주이기는 했지만 그의 뒤에는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는 김종서가 있었기에 영토 확장데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신하들 중 세종에게 가장 신임을 받았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조선의 외교정책인 사대교린 정책과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