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담수첩] 어머니와 함께 했던 고궁 나들이. 역사의 그날들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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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간 추석 다음날이면 엄마와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해왔다. 엄마는 결혼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내 나이만큼의 세월에 일 년을 더 사셨음에도 같이 사는 남자와 어디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집에 어디 남자가 무뚝뚝한 아버지뿐일까. 그보다 덜 무뚝뚝한 아들,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재작년 추석 다음 날, 엄마가 어디라도 나가자는데 연휴에 서울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 어디일까 생각했다. 그렇게 첫 나들이 장소는 종묘로 정해졌다. 어딘가 그럴싸한 곳을 데려갈 줄 알았는데 돌아가신 왕들을 모신 사당이라니 약간은 실망한 눈치였지만, 멋들어진 건축과 푸르른 자연이 섞인 종묘에 엄마는 금세 매료됐었다.

폰카메라로는 한 번에 담기지 않았던 정전.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내년에는 창덕궁에 가자고 했다. 궁궐이라고는 10여 년 전 경복궁을 딸과 함께 한 번 다녀온 것이 엄마에게는 전부였다. 생각해보니 나도 경복궁 몇 번 다녀온 것과, 서울 역사 박물관을 간 겸 해서 경희궁을 잠시 들렀던 것이 전부였다.

다시 찾아온 추석, 두 번째 나들이에는 동생이 함께 나섰다. 종묘를 다녀왔을 때처럼 차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4대문 안, 궁궐 주변 온통을 다 다녀봤지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했다. 밥도 못 먹고 4대문 안 이리저리를 헤매다, 결국 서오릉에 들렸다가 왔다. 오는 길 차 안 분위기는 말도 못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은 찾아왔다. 차 없이 지하철을 타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종로3가역에 내려서 돈화문까지 걸어가는 길은 의외로 한산했다. 돈화문에 다다르자 붐비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무료 개방임에도 매표소에 줄지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후원에 가려고 예약한 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내년에는 미리 예약하고 후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덕궁의 백미는 역시 후원이니까.

광화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쭉 걷다 보면 근정전이 다다르는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면 시선은 정면이 아닌 오른쪽으로 향한다. 경복궁이 네모 반듯하게 지어져 법궁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는 반면에 창덕궁은 원래 있던 땅의 모습을 거스르지 않고 조금씩 비틀어져 건물들이 세워져서인지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모습이다.

그렇게 태종 이방원이 창건한 창덕궁은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태종은 정도전의 사상이 녹아들어있는,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형제들을 죽였던 장소, 경복궁보다는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조선을 그려나가려 했을지도 모른다.

고려 왕조의 궁궐이 있던 개경의 만월대 터를 보면 송악산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궁궐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버지와 형님 두 선대왕을 모시던 시절 잠시나마 개경 생활을 했을 태종이 창덕궁도 그렇게 짓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물론 정도전과도 다르게 짓고 싶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직선의 동선으로 연결된 경복궁과는 달리 비스듬한 발걸음과 시선을 유도하는 창덕궁이 규모는 작아도 더 운치가 있어 보였다. 아마도 창건 당시에는 지금 경복궁의 규모보다 컸을 것이다. 지금의 경복궁은 중건하며 창건 당시보다 규모가 커졌다 한다.

돈화문을 지나 나오는 금천교,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말해주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엄마는 나의 설명에 한번 더 눈길을 보냈고, 나는 난간을 쓰다듬으며 이곳을 지나갔을 조선의 왕들의 시선을 상상했다. 그때는 물이 흘렀을까, 내가 선 이 자리에 잠시 멈춰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을까. 역사적 장소에서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 그때와는 다른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생각들을 해본다는 것, 이것을 문학적 상대성 이론(1도 모르면서...)이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정면에서 바라볼 때보다 비껴서 추녀와 일직선상에서 바라볼 때 더 멋진 것 같다. 예전에는 각 나라마다 처마의 곡선이 다른 것이 그 나라 고유의 양식인 줄로만 알았다. 너무 들어 올려져 있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우리나라의 처마 곡선이 제일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추녀를 받히는 나무 기둥이 비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함이란다. 그래서 각 나라 별 기후의 특성에 맞게 저 마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알쓸신잡2' 유현준 교수가 그랬다. 알고 보니 쓸모 있고 신기했지만, 알고 나니 쓸쓸했고 신비함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었다.

사진을 바닥에 포커스를 맞췄어야 했는데 푸르른 가을 하늘에 너무 반했나 보다. 역시나 처마의 곡선과 단청에 매료되어 있는 엄마를 붙잡고 설명을 해줬다. 저 네 개의 기둥이 건물 바깥으로 나와 지붕을 얹고 있는 이유와 포장된 길의 모양이 부채처럼 펼쳐진 이유는 차가 드나들기 위함이었다고. 또 한 번 상상했다, 순종이 포드 자동차에서 내려 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아쉽게도 희정당의 마당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희정당은 왕의 침전이다. 편전으로 사용했던 선정전이 좁아 편전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뒤에는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위치한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있었는데, 당시 일제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을 창덕궁으로 옮겨와 다시 지었다고 했다. 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이번에도 엄마에게 또 설명을 이어나갔다. 왕이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에 용은 있을 수가 없었다고, 또 왕손을 생산할 곳에 용이 있어서는 안되었다고, 용은 왕을 상징하니 하늘 아래 두 마리 용은 용납할 수 없었다고.


대조전은 저물어가는 조선의 비극이 담겨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대조전과 이어진 저 흥복헌이라는 곳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국권을 상실했다. 이름처럼 복이 흥해 왔던 장소였을 그곳은 복이 망하는 경술국치의 현장이 됐을 줄이야. 일제는 그걸 노렸던 것일까. 조선의 생이 이어가던 장소에서 조선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 탯줄을 끊어내듯, 용의 허리를 끊어내듯 말이다. 차에서 내렸던 이는 순종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희정당 마당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내부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인정전의 내부 모습처럼 근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연휴 때 결방한 '미스터 션샤인'이 생각나서 였을까. 미국 공사관 건물도 아닌데, 저 복도 끝에서 유진 초이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맞은편에선 임역관이 배시시 웃으며 나으리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안티 김은숙'이었던 내가 이리도 빠져버렸다니...배우들 덕이지 작가 때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다.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깜짝이야, 도깨비 보지도 않았는데...안돼!!! 덜 안티 김은숙이 되기로 했다.

왕이 업무를 보던 선정전의 청기와. 궁궐의 모든 건물이 청기와였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봤다.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해 담장 너머로만 바라봤다. 창경궁으로 넘어가야 했고, 밥 먹고 덕수궁도 들러봐야 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덕분에 헌종이 짓고, 덕혜옹주가 마지막을 보냈던 낙선재도 둘러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렸음을 돌아오는 길에 알았다.



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함양문을 지나 창경궁으로 향했다. 용마루가 없는 건물이 보였다. 침전이로구나. 엄마와 나는 옆에서 걸어가던 무리들의 대화 속에 용마루가 없는 이유에 대한 물음을 들었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엄마의 입꼬리가 씰룩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음이 씰룩거렸다. 마루에 사람들이 들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서둘러 내려가 앉아보고 싶었다.

비탈길에서 내려와 눈높이에서 마주한 창경궁의 모습은 다른 궁궐들의 분위기와 달랐다. 담장이 없어 탁 트인 모습은 각각의 건물들이 모두 눈에 들어와 이채로워 보였다. 담장은 원래 없었던 것이었을까를 또 상상했다. 궁을 동물원으로 바꾸어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던 일제가 구경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건물 사이의 경계를 모두 없앴던 것은 아닐까.

매번 이렇게 개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무로 지어진 전통 건축은 역시 사람의 때가 입어야 산다.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청장 할 때 경회루의 마루를 개방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백날 몇 사람이 마른 걸레로 닦아봐야 사람들이 앉고 걷고 하며 지내게 놔두는 것이 더 윤이 나게 하고 집을 살리는 길이다. 물론 상시 개방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옥을 살림집이라고 했을까? 사람도 살고, 집도 살고.

전통건축은 밖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것보다, 건물 안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서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마당에서 건물을 바라볼 때 느끼게 되는 경계는 안으로 들어와 바깥을 바라봄으로써 사라진다. 그것이 차경이다. 한마디로 경치를 빌려오는 것이다. 앉아서 보이는 모든 곳은 경계가 사라져 곧 나의 공간이 된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보인다. 배가 너무 고프고, 다리가 저려온다. 볼 만큼 봤으니 밥 먹고 집에 가자고 하려는데, 엄마는 밥 먹고 덕수궁에 빨리 가야지 하신다. 그래야지요, 네 그렇게 해야죠.

홍화문 앞의 돌다리에 서니 여기는 물이 흐른다. 그러고 보니, 궁궐의 정문을 지나면 모두 개천을 건너는 돌다리가 있었다. 더 자세한 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팠고, 사진 찍느라 스맛폰도 쫄쫄 굶어 빨갛게 경고의 표시를 건넸다. 점심을 해결하고 덕수궁으로 향했다.


접근성이 창덕궁보다 더 좋아서 그런지 덕수궁에 사람이 더 붐벼 보였다. 덕수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뒤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지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유리로 지어진 정원, 대온실도 이곳에 있을 줄 알았다. 대온실은 창경궁 정문 옆길로 가야 있었다.

석조전 내부도 예약자에 한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통제되지 않는 관람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옆의 미술관 내부에서 들었다. 전시된 그림을 만지고, 펜스가 있음에도 가까이서 보려는 아이들과 그와 같은 수준의 어른들. 명절 연휴에 무료 개방도 좋다지만, 평소에도 입장료를 조금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게 역사 유적지를 방문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입장료가 싸도 너무 싸다. 그래서 의식 수준이 안 오르나, 값이 오르기 전에 문화유산을 대하는 태도부터 성숙해져야 할 것 같다.

미술관 계단에 걸 터 앉아 바라보는 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이 한 폭에 다 들어오는구나.

그날 봤던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건물, 석어당이다. 이곳에서 가장 사연이 많은 건물이 아닐까.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승하하고, 그의 아들 광해가 인목대비를 가두었고, 결국 그 때문에 자신이 무릎을 꿇어야 했던 곳. 그래서인지 더 쓸쓸해 보였다.


다봤다. 이제 집에 가즈앗!
하루에 고궁 세 군데를 다 둘러본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정이었다. 엄마를 자주 모시고 다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연중행사같이 일 년에 한번 데이트하는 꼴이라니. 내년에는 꼭 창덕궁 후원 예약 잊지 말고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짓담수첩] 어머니와 함께 했던 고궁 나들이. 역사의 그날들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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