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날아오는 화살의 과녁이 되어주는 것, 개와 고양이와 친구의 시간.

eternalight(62)
Published in
#kr
Words
895
Reading
4 min
8y
Listen to this post
~6 min

스팀잇대문.jpg


해가지기 전, 친구는 평소처럼 어디냐고 묻고 다음에 '간단하게 고기?'라며 나를 유혹했다. 평소 같으면 거절하지 않던 내가 다음에 하자는 말을 꺼내니 친구는 평소와는 다르게 아쉬움을 묻어내며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나도 짧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다시 대화로 불러내더니 술 한잔 가볍게 먹고 싶다 한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다시 다음을 기약했다. 그제서야 그날의 우리 대화는 끝이 나는 줄 알았다.

어버이날 연휴를 맞이하여 엄마는 외삼촌과 함께 할머니, 형제들을 보러 고향에 내려갔다. 그리고 그날은 외삼촌댁 근처의 터미널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친가의 일로 시골에 내려가서 연락 없이 지내다 오면 서운해하던 엄마는 이틀 내내 연락이 없었다. 남쪽 지방은 연휴 내내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야구 경기를 지켜보며 알고 있었다. 엄마는 일주일 전부터 기상예보를 찾아보며 고향집 근처의 산으로 철쭉 구경 갈 생각에 설렜지만 예보되어 있던 비 소식은 일주일 내내 바뀌지 않았다. 결국 집에만 있었다는 소린데 전화조차 없었다. 대신 맛있는 음식을 드셨겠지. 도착할 때를 맞춰 전화를 걸어 어디쯤 오냐 데리러 가겠다 했다. 그래서 친구와의 만남은 다음으로 미뤄지는 듯했다.

올라오는 버스보다 먼저 도착한 나는 터미널 대신 근처의 외숙모 댁으로 차를 몰았다. 평소와 같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솜이, 평소와 다르게 다소곳이 다가오는 업댕이 그리고 내가 온 줄은 아는지 모를 가이가 자신들의 식구들과 함께 나를 맞아주었다. 고양이와 눈만 마주쳐도 치를 떨던 내가 어느 때부터인가 강아지보다 고양이에 눈이 먼저 갔다.

크기변환_IMG_1940.JPG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소파에 앉자마자 부비부비를 시작한다. 업댕이는 업어와서 이름이 업댕이가 되었다. 사실 업댕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집사를 고른 격이므로 업댕이라는 이름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아파트 1층에 사는 외숙모네 화단에서 그렇게 울어댔다고 한다. 자신을 키우라고!

크기변환_회전_IMG_1937.JPG

솜사탕처럼 하얗다고 해서 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녀석. 나를 보자마자 반가움에 바닥에 오줌을 지린다. 그리곤 득달같이 달려든다. 바지에도 오줌을 지리던 전의 기억이 떠올라 저리 가라 손짓하며 업댕이를 쓰다듬는다. 그래도 거침이 없다. 자신도 이뻐해 달라고 연신 기어오른다. 목덜미를 잡히고서야 잠잠해졌다.

크기변환_IMG_1936.JPG
크기변환_IMG_1935.JPG
크기변환_IMG_1942.JPG

전에 없던 애교를 장전하며 나를 향해 귀여움을 발사하는 업댕이. 이제는 소름 대신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크기변환_IMG_1939.JPG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발등에 올라탔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니 업댕이는 엉덩이가 따뜻하고 나는 발등이 따뜻하다. 순간 다시 기어오르는 솜이. 솜이를 보니 불안이 불현듯 스쳤다. 업댕이도 오줌을 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큼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회전_IMG_1945.JPG

놀란 업댕이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업댕이.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을 표시했는데 오해는 결국 이별이 되었다.

크기변환_회전_IMG_1946.JPG

쪼쪼쪼 소리를 내어 불러보지만 고개만 내밀뿐 다시 오지 않는다.

크기변환_회전_IMG_1943.JPG

불러도 대답없는 녀석. 드문드문 있던 분홍색 발바닥을 찍고 싶었는데 나를 할퀴고 도망갔다. 도망간 것인지 본래의 자리를 찾아간 것인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IMG_1938.JPG

그렇게 두 녀석과 요란스럽고 반가운 인사를 마치고 나니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가이. 소리를 낼 수도 쿰틀대지도 못해 나에게 인사조자 건넬 수 없던 가이. 눈물이 핑 돈다. 너에게 먼저 달려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뒤늦게 인사를 건넨다. 머리를 쓰다듬어도 발을 쓰다듬어도 대꾸가 없다. 백내장이 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이제 치매기까지 있다고 한다. 3년 전 어미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더 쇠약해졌을 가이었다. 가이는 할머니다. 남자를 뜻하는 이름이 아니다. 개를 풀어써서 이름이 가이가 되었다. 집을 나서며 녀석과 다시 인사를 했다.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는 벌써 삼년이 지나도 계속되었다. 가이야 나중에 또 올게. 그때도 거기에 있어주렴.

이 집에 외숙모네가 이사 온 후로 얼마 되지 않아 가이 엄마 나리를 입양했었다. 나리가 낳은 자식 중에 하나가 가이었다. 집에서 반대만 안 했다면 우리 집에도 가이의 형제가 함께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가이와는 다르게 곁에 없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림잡아 나이를 물어본다. 15년을 살다간 나리보다 2년을 더 살았다. 자그마치 17년이다. 솜이만큼은 아니어도 반가워 달려오던 가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인과 함께 세월을 보내지만 그 속도는 맞추지 못해 이렇게 슬픈가보다.

크기변환_IMG_1944.JPG

어느새 솜이는 다소곳이 내 곁에 앉아있다. 바지가 점점 축축해지고 있는 것은 착각이리라, 외삼촌이 오시면 그때는 이 시간도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쓰담쓰담하며 당분간은 나누지 못할 온기를 주고받는다.

저녁때를 지나 도착한 엄마와 외삼촌은 늦은 저녁을 드시고 나는 출발하기 전 나누었던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는다. 평소와는 다른 낌새가 보이는 것은 가이가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이겠지. 가이와는 다르게 우리의 속도는 발맞추어 걷고 있으니까.

크기변환_IMG_1947.JPG

업댕이도 외삼촌이 챙겨준 늦은 저녁을 먹는다. 외숙모가 너만 밥을 안 준 이유를 알겠다. 살 좀 빼자 엉덩이가 너무 복스럽구나 업댕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할머니와 다른 집 식구들의 안부를 전해 듣는다. 내년에는 함께 내려가기라 속으로 다짐한다. 늦은 밤 도착해서 친구에게 이제서야 돌아왔다는 말을 전한다. 평소 같았으면 답을 주지 않고 다음을 기다렸을 텐데 그날만큼은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역시나 지금이라도 보는 것이 어떠냐 물어온다. 어디냐는 나의 물음에 친구는 걷고 있다는 답을 준다.

초저녁에 만났다면 만날 시간만 정하고 갔을 고깃집을 대신해 동네 근처에서 치킨에 가볍게 소주 한잔하기로 한다. 혼자 걸으며 본인에게 묻고 대답하며 답답했을 그 문답이 나를 만나니 조금은 풀어지는 듯하다. 그 어느 때보다 함께 마시는 소주가 달다. 함께 대화를 주고 받은 시간은 짧았지만 오래도록 친구 혼자서 책 보고 영화 보며 보냈을 그 시간보다 더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며 헤어진다.

어떤 책을 보았느냐 물었더니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있다고 했다. 전공서적이외에는 보지 않았던 친구는 몇 년 사이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책을 찾는다. 복잡하게 엉켜있던 생각의 질서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친구를 위해 사놓고 먼지만 쌓여가는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을 다음에 빌려주기로 했다. 제목은 나와 더 어울릴 것 같았는데 목차는 친구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회전_IMG_1933.JPG

나와 헤어지고 친구는 자기 넋두리 들어줘서 고맙다는 카톡을 보냈다. 들어주는 게 뭐 어렵다고, 잘 자라는 인사를 보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솜이, 다소곳이 다가오던 업댕이,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가이 그리고 20여 년을 함께 보낸 친구. 그날 밤 내가 주고받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함께한 시간이 짧고 긴 것만 다를 뿐,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아 따뜻한 밤이었다.

나의 쓰담쓰담에 솜이, 업댕이, 가이는 따뜻한 온기를 전해 주었고, 다른 누구를 찾지 않고 나에게 와서 넋두리를 털어놓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

솜이가 지려낸 축축함과는 다른 촉촉함이 마음속에 다가왔다.

날아오는 화살을 기꺼이 맞아주는 과녁이 된다는 것,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으려면 그 화살의 궤적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움직이며 날아오는 화살처럼 받아 낼 과녁 또한 멈추어 있지 않으니 말이다.


[별담수첩] 날아오는 화살의 과녁이 되어주는 것, 개와 고양이와 친구의 시간.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