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족구왕. 타인의 소중한 현재를 빼앗을 것이 아니라면 '조ㄱㅎㅘ고 앉아있네' 라는 말은 배속에 넣어두고 배설하자.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니까.
영화를 고르다 스틸 사진 속 배경을 보고 보기로 결심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캠퍼스는 반가웠다. 근데 족구장이 있었던가. 응답하라 제작진이 영화 '바람 ' 정우를 보고 캐스팅했다 들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보고 안재홍과 후속작을 함께 했을까.
학교 체육대회 때 족구하다 찢어진 내 뉴발란스 993이 떠올랐다. 이런 신발... 산지 얼마 되지 않았던 큰맘 먹고 산 놈이었는데, 수비하다 쭉 뻗은 발이 아스팔트에 끌려 구멍나고 말았다. 겉만 번지르르하던 신발을 탓해야 할까, 나서지 않아도 될 족구 경기에 참가했던 나 자신을 탓해야 할까.
결국 경기에는 지고 얻은 것은 없으니 신발만 외치던 나는 때깔을 잃고 만 신발과 함께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족구는 참가의 의미만 있었지, 얻으려 한 건 없었어라며 동생들을 위로했지만 최선을 다했던 나머지 종목들에서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우승이었을까, 우승의 부산물이었을까. 과제에 시달리며 짬짬이, 끝나고 술이나 한잔 기울이려 했던, 우승으로 달려가던 연습은 스코어가 뒤진 채 불려 진 휘슬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루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영화의 전개는 너무도 뻔하다. 피구왕 통키를 보았다면, 축구왕 슛돌이를 보았다면, 아니 그런 것들 보지 않았더라도 너무도 뻔한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하게 한다. 아니다, 이미 뻔하디 뻔한 인생의 커리큘럼을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주인공 만섭이고 싶어 할지도.
자신은 가보지도 못 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후배의 현재를 걱정하는 선배 형국은 꼰대가 되고, 다시는 못 갈 시절의 낭만을 붙잡지 못해 현재를 아쉬워 하는 고깃집 아줌마는 타령만 늘었고, 지나 간 영광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강민은 지금도 지나고 있는 현재를 보지 못한다.
오로지 만섭만이 당장 지금의 시간, 앞에서 뒤에서 강 스파이크처럼 무엇이 오든 받아내며 현재를 살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기가 힘이 든 세상을 살고 있다. 이 시대 청춘들 속에는 어느새 자신 속에서 자라난 꼰대도, 타령도, 영광도 있지만 충실히 살아갈 현재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다. 영화 같은 현실을 붙잡기 위해선 포기해야 할 현재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지 못한다면 지난날을 아쉬워하며 다가오는 미래를 걱정하는 꼰대, 타령, 빛없는 영광만이 자신도 모르게 속에서 자라고 있지는 않을까.
떠나간 과거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살고 있다면 타인의 현재를 무릎 꿇게 만들 권리는 없다.
지난날의 과거를 떠올리며 꼰대가 될 뻔했던 영감님을 살린 건 백호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