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년 전,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불명예스럽게 고향 팀을 떠나고, 김기태가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에게는 선수 시절에 뛰어보지 못했던 고향 팀이었다. 당시 타이거즈의 미래이자 얼굴이었던 안치홍의 거취를 두고 선동열 감독이 했던 말이 팀 팬들을 들끓게 했다. 이제는 팀 레전드의 방출을 두고 김기태 감독에 대한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레전드의 방출 통보는 심지의 끝에 있었을 뿐, 이미 그 도화선의 불꽃은 알게 모르게 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불꽃의 존재를 팬들은 알고 있었고, 감독은 몰랐을 뿐. 폭발의 원인이 레전드의 방출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단이 단지 그것만으로 팬들의 원성의 이유를 단정 지으려 한다면 더 큰 문제이다.
김기태 감독이 기아 타이거즈에 부임하며 내건 캐치프라이즈는 '동행' 이었다. 선수 위에 군림하지 않고, 선수들과 함께 걷겠다는 그의 포부가 마음에 들었었다. 선동열 전 감독이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을 때 나는 내심 김기태 감독이 기아에 오기를 바랐다. LG 감독 시절의 그가 좋았나 보다. 그러나 그것은 밖에서 봤을 때 좋은 것이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시즌 막 바지 감독 옆에 있어야 할 수석코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수석코치가 감독에게 쓴 소리를 해서 감독 눈 밖에 나 2군으로 내쫓겼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리고 시즌 후 팀에서 쫓겨났다.
올 시즌 중반 잘 던지고 있던 투수 임창용과 투수 코치 이대진이 2군으로 내려갔다. 그 때도 무수히 많은 소문들이 있었다. 선수가 감독에게 불만을 표출했다는 기사도 간간이 보였다. 투수 코치가 2군으로 내려가기 몇 일 전, 흔들리는 투수를 달래려 마운드를 향하던 코치를 팔로 제재하며 마뜩잖은 얼굴로 코치를 바라보던 감독의 얼굴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LG 감독 시절에는 팀에서 현역 선수로는 가장 많은 도루를 하고 있던 이대형을 내쫓았다. 나는 당시 이대형의 시즌 기록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록을 찾아보니 역시 그렇다. 출전 한 게임 수는 많으나 타자로서 들어간 타석이 적다. 그것은 대주자로서 많이 활용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거기서 불화가 생겼을까. 내부 사정을 알리 없는 팬들은 소문을 무성하게 만들었다. 이대형이 불만을 표출해 김기태 감독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보이니 소문이 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선수나 코치를 곁에 두지 않고 내쫓는 것이 그의 지도 스타일일까. 예나 지금이나 그의 사사로운 감정에 팬들의 마음이 다치고 있다.
LG 시절, 이대형의 기록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생각해보자. 올 시즌 임창용의 기록 또한 표면적으로는 좋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팀의 어려운 사정에 전천후로서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가리지 않고 뛰었다. 현대 야구에서 이런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물다. 임창용이 삼성 시절 때를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라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던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팀에서는 어린 선수들에게 더 기회를 주고자 노장인 임창용을 방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몇 일 전 한꺼번에 발표한 방출 선수들과 달리 따로 발표한 것은 선수에 대한 배려였다 한다. 과연 어린 선수들 중에 내년 시즌 그 보다 나은 성적을 낼 만 한 투수가 있는지 묻고 싶다.
이제 더 이상 팀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데 더 버티겠다는 것은 선수의 욕심이다. 그것은 팀에게도 좋지 않고 팀을 이끄는 단장과 감독에게도 고민을 떠 앉기는 꼴이다. 팀의 레전드라서 부족한 실력에도 굳이 같이 가겠다는 것은 팬들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투수 임창용의 20년 넘는 팬이라서 사사로운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돌고 돌아 타이거즈로 복귀해 매 번 봐왔던 그의 구위는 예전 같지 않았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올시즌 활약을 지켜보면서도 앞으로 2-3년은 더 뛸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야구장을 찾을 때마다 그의 투구를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그나마 위안 삼은 이유이다.
오로지 성적으로만 평가 받는 프로 스포츠에서 순위는 정말 중요하다. 허나 이기는 것만이 팬들이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졌잘싸'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할 만큼 이제 팬들의 의식 수준도 높아졌다. 하지만 현장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해한다. 감독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계약 기간을 남겨두고도 바로 내쳐질 수 있는 자리다.
팬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진 것에 비해 현장 지도자들이나 프론트의 수준은 아직 출범 초창기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사태를 과연 타이거즈의 감독과 프론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팬들이 생떼를 쓰는 것쯤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국민청원까지 한 팬들은 생떼를 쓰는 것이 맞다. 제발 사리분별하면서 올리자.
경기장에는 그라운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곁에는 관중석이 있다. 그라운드 위에 선수들이 있다면 그 선수들을 바라보며 응원하는 팬들이 곁에 있다. 선수들만 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사인이 중고 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보고는 사인의 희소성을 운운하며 어린 아이들에게 조차 사인을 해주지 않던 국민 타자, 미국으로 건너간지 얼마 안 되어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를 기다렸던 팬들을 외면한채 뛰어가던, 몇 일 전 한국인 최초 월드시리즈 선발에 올랐던 메이저리거. 후배는 생각과 행동이 많이 바뀌었던데 KBO 홍보대사를 맞고 있는 국민 타자의 생각은 아직도 유효할까.
그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혼자 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팬들을 외면한 채 뛰어가던 그 선수 곁에 동료들은 일일히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이기는 것에만 몰두하며 즐기는 것을 배우지 못한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릴 적 찾았던 야구장에서 어린 팬들의 싸인 요청을 매몰차게 무시하며 차에 오르던 그 선수를 아직도 기억한다.
비호감이었던 오재원을 이제는 달리 보며 멀리서 응원하는 것은 그가 팬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농구대잔치 시절 연세대의 인기는 어마어마 했다. 물론 나는 No. 32 현주엽의 고대 팬. 아무튼,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던 연대 선수들에게 스타병이 도지지 않았을리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대학생들이 겉멋에 취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농구 잘해, 얼굴 잘 생겼어 그래서 인기도 많아. 얼마나 좋은가. 딱 더이상 노력하지 않고 열심히 뛰지 않을 조건이다.
선수들의 그 모습을 간파했는지 최희암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너희가 볼펜 한 자루라도 스스로 만들어본 일이 있느냐. 너희처럼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 애들이 스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팬들 덕분이다. 항상 팬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잘해야한다
선수들이 잘 한 것도 있겠지만 이런 감독의 리더쉽이라면 잘 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최희암 감독이 명장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새삼 깨달았다.
지금 한창 플레이오프를 치루고 있는 SK는 시즌 중반 기아와의 홈 경기 2연전에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패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새 그것도 40여 점을 뺏기는 모습을 보는 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런 경기를 보려 티켓을 끊었던 것일까 후회가 막심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응원하는 팀이 크게 이겨 기분이 좋았지만, 대패 한 상대팀에서 행한 일 때문에 더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히 홈에서 치뤄지는 경기를 SK 염경엽 단장은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단장들이 다 그러하지 않을까. 하루도 아니고 이틀 연속 대패를 팬들에게 보여 준 단장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염경엽 단장은 팬들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았다. 팬들이 나가는 게이트에 대표이사와 함께 직접 서서 아이스크림을 손수 나눠주었다. 기사를 본 누군가, 혹은 현장에 있던 팬들 중 일부는 '고작 아이스크림으로?' 라는 마음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아이스크림이 나중에는 큰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이 팬들과의 교류가 아닐까. 뭔가 큰 이벤트보다는 이러한 사소한 것에서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팬서비스이다. 비교하는 것 정말 싫어하지만 같은 고등학교 친구라는 우리팀 감독과 너무 다르다. 감독으로서도, 단장으로서도 이렇게 일을 잘하니, 엄청났던 김감독의 선수시절에 비해 초라했던 염단장의 선수시절 그늘이 싹 사라지는 것 같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이기고 우승하는 것은 응원하는 팬들이나 선수들이나 그리고 지도자들에게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매 번 하나일 수밖에 없다. 1위에 가려진 2위도 존재하고 꼴찌도 존재한다. 이제 이기는 것에만 목을 메는 팬들도 많이 사라졌다.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이 감성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이성적으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팬들이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공놀이를 보는 이유이다.
리더는 물러날 때도 알아야 한다. 이제 더 이상 팬들은 김기태 감독 당신과 동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당신이 말했던 동행이 이런 것인가. 그라운드에 몸소 누워 심판에게 항의해 '눕기태' 라는 별명을 가졌을 때도 나는 당신을 응원했다. 3루수를 포수 뒤로 보내는 듣도 보도 못 한 기이한 수비 쉬프트를 선보일 때도 그랬었다. 그때 당신에게서 느꼈던 승부욕이 이제는 기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년 시즌 수석코치를 없애겠다는 당신의 구상도 이제는 더 독선적으로 혼자 다 하겠다는 뜻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144경기가 치뤄지는 가운데 감독의 역량으로 승부가 갈라지는 게임은 10게임 남짓이라는데, 올해 그가 띄운 승부수가 통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2009년 우승과 더불어 작년 우승도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가능했지, 감독의 역량은 아니었다.
김기태 감독을 보좌하던 수석코치에서 이제는 단장의 자리에 앉아 꼭두각시처럼 감독의 말을 다 들어주는 조계현 단장님. 김감독의 야구계 선배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김기태 감독과 함께 용퇴하시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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