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기억 #2. 피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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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일 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내는데 하루는 증조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의 재사고, 다른 하루는 증조할머니의 제사다. 증조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는 만주에서 피난 길에 헤어지신 날을 기일로 삼는 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증조할머니의 제사는 왜 그 날이 기일인지, 그리고 산소는 왜 따로 모셔 놓지 않았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한 건 증조할머니 제사 때마다 할머니께서 음복을 과하게 하시는 연유도 궁금했다.

“할머니, 술 좀 고만 드세요. 나중에 또 멀미하실라고 그래요.”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는 할머니를 만류하자 할머니를 대신해 둘째 삼촌이 지나치듯 대꾸하신다.

“내비둬라. 오늘 만큼은.”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하면 둘째 삼촌의 ‘오늘 만큼은’이라는 의미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내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한창 배부르게 먹고 난 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서야 비로서 나는 둘째 삼촌으로부터 증조할머니의 산소가 없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부터 울려 퍼지는 포성에 서울 인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졸이며 방안에 숨 죽여 있었다. 천근같은 무거운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동이 터서야 사람들은 북괴군이 남침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세간살이를 내팽겨치고 며칠간 챙겨먹을 수 있는 음식과 새벽 이슬을 막을 수 있는 외투만 겨우 챙긴채 피난길에 나섰다.

소하와 순례도 피난 길을 나서려던 참이였다. 순례의 부모님과 오빠는 춘천에 사는 작은 삼촌내로 가려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소하와 순례는 순례의 여동생 내외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무래도 동시 다발적으로 남침하는 북괴군의 성향을 봤을 때 춘천보다는 남쪽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함께 마을을 빠져나오면 좋으련만 혹시라도 남침하는 북괴군에게 가족들의 발목이 잡힐까 염려스러웠던 소하는 순례의 손을 꼬옥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금방 뒤 쫒아 갈테니 엄니 잘 모시고 먼져 내려 가시오.”

순례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이를 꽉 물고 돌아섰다.

소하는 청년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마을에 잔류했고 후에 국군에 징집되었다. 어려서부터 만주에 거주했던 그는 형을 따라 외국어 배우는 것을 좋아했는데 영어를 특히 좋아했었다. 비록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영어가 유창했던 소하는 운이 좋게도 미군 부대(지금의 카투사?)로 편입되었고 미군과 국군을 잇는 교두부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순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피난 길에 나서는데 넉넉한 집안의 여식으로 곱게 자란 그녀는 피난 길 걸음이 더디기만 하다. 더욱이 나이든 시어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상황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기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북괴군의 포탄도 포탄이였만 사실 북괴군의 포탄보다 무서웠던 건 물 밀듯이 쏟아지는 피난민의 행렬이였다. 순간의 방심이 피난민의 발길에 파뭍혀 비명횡사할 수 있는 상황이였다. 영화에서처럼 헤어진 연인이나 가족을 향해 피난민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은 결국 영화에서나 가능한 사실이였다.

“어머니, 제 손 꼭 잡으시어요. 절대로 손을 놓으시면 안됩니다.”

기력이 다한 상황이였지만 순례는 소하와 한 약속을 굳게 지키고자 마음 먹고 있었다. 소하를 통해 그의 아버지와 형님이 어떻게 헤어지셨는지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실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상황을 고려해줄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난민의 행렬에 이끌려 그저 걷고 걸을 뿐이였다. 아낀다고 아낀 음식도 이제는 곧 동이 날듯해 보였다. 순례도 어머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였지만 둘 다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이것 좀 더 드세요. 저는 동생내외랑 조금 챙겨 먹었더니 입맛이 없네요.“

순례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머니는 달리 어떤 말을 꺼낼 방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식사를 마치시고는 어둠을 이불 삼아 곤히 잠이 들었다.

멀리서 들리는 포성에 새벽부터 서둘러 피난길을 재촉했다. 공포에 짓눌린 피난민들의 발걸음 빨랐다. 자칫 잘못 발을 디뎌 넘어지기라도 했다가는 북괴군보다 피난민의 발에 밟혀 죽을 판이였다. 순례는 어머니의 손을 더욱 세게 잡고는 굳세게 걸어나갔다. 하지만 새벽내 잠을 설쳐서 그런지 아니면 며칠째 밥다운 밥을 먹지 못해서 그랬는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 때쯤이였다.

‘에미야. 내가 염치없이 너무 오래 살았는갑다. 그때 서방님따라 내가 먼저 갔어야 했는데... 대하를 먼저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죄인이다. 내 이제 갈 때가 되어서 가는거니끼니... 너무 슬퍼하거나 자책하지 말거라. 소하를 잘 부탁한데이. 금실 좋게 살그라.’

어느 순간 맞잡은 손의 온기가 사라졌다. 순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머니!

텅빈 손을 바라보니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피난민에 쓸려 내려가기만 할뿐 멈추어 설 수도 왔던 길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

순례는 목 놓아 어머니 부르며 오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오열에도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갓난쟁이를 가슴에 뭍은 아지매, 포탄에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아저씨, 부모와 헤어져 눈물 범벅이 된 코흘리개 어린 아이... 그날 그 피난길에는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증조할머니에 대한 언급은 저희 집에서 금기시 되는(?) 이야기라 딱 한 번 전해 들었습니다. 평소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와 대화 중에 화를 잘 내시곤 하셨는데 삼촌들 이야기로는 아마도 그때 증조할머니를 잃어버린 일 때문에 마음에 화가 쌓여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ㅠㅠ 아버지와 형, 그리고 어머니까지 온전하게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헤어져버린 할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네요. 그리고 그 일로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오신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향년 93세의 나이로 별세하셨고, 할머니는 현재 88세의 나이로 상당히 장수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먼저 가셨던 증조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머니께서 그분들을 보살펴 주셔서 장수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아픔없는 천국에서 가족들을 모두 만나셨길 바라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고 감사한 하루보내세요^^

할아버지 기억 #1. 만주 마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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