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께서 가장 많이 해주셨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전쟁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심 최전선에서 용감하게 적군을 물리치는 무용담을 기대했었지만, 나의 기대와는 달리 매번 적군을 피해 도망쳤던 이야기, 포로로 잡혀있다가 탈출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였습니다. 어린 시절 철없던 저는 그런 이야기들이 시시하고 재미없게 들렸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곰곰이 곱씹어보니 그 순간순간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기만 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적군을 물리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는 연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적군을 사살하는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혹시 있었을지 모르는 그런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가슴 속에 묻으시고 사죄하고자 하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전쟁에 참여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씻기 힘든 기억이 남아있을 터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할아버지께서 적군의 공격에 고립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 중 한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눈부신 영웅담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처절한 생존기이기 때문에 큰 기대없이 읽어 주었으면 합니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포탄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로 옆 소대장의 지시도 알아 듣지 못할만큼 청각도 감각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적진의 한 복판에 고립되어 있었다. 아마도 본대의 퇴각 신호도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나보다.
적군의 눈을 피해 산속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낮 동안 적군에게 발각될까봐 두렵기도 했지만 사실 해가 떨어진 저녁시간이 더 두려웠다. 이가 부딫칠만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은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산길을 따라 그저 남쪽으로 걸었다. 중간에 버려진 민가에서 겨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주위에 가득한 적군,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이 점점 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만들었다.
한참을 남쪽으로 걷다보니 어느새 넓직한 강이 나타났다. 주위 동태를 살펴보니 강 건너 쪽으로 아군과 대치를 하는 듯 보였다. 드디어 삶에 대한 희망이 나타났다는 기대감들었지만 이 엄동설한에 강을 건널 생각이 차마 들지 않았다. 문득 만주 마적단에게 쫓기던 때가 생각났다. 형님이 강물로 뛰어들어 마적댄을 이끌어 낸 덕에 여지껏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생명줄도 오늘로써 끝인가 보다. 강물로 뛰어드는 순간 참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적군의 총세례에 벌집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얼어붙다시피 시퍼런 강물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 강물만 넘어서면 생의 끈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의 끝에 다다른 후에 아이 몸집만한 돌덩이를 들고 강물 앞에 섰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소리내지 않고 강물속으로 들어섰다. 한 낮이었지만 여전히 강물은 살을 에워싸는 듯 차가웠다. 얼굴까지 강물에 잠긴 후에 큰 호흡으로 공기를 잔뜩 들여 마시고는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강바닥을 아이만한 돌덩이에 의지한 채 걸었다. 최대한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버틴 후에야 돌덩이를 내려놓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혹시나 적군에게 들킬까봐 겨우 입만 내밀어 숨을 몰아 쉬고는 다시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였지만 강물의 반도 건너지 못했다.
강물 속은 생각보다 어둡고 아늑했다. 돌덩이에 몸을 의지한 채 편안히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자칫 수면위로 올랐다가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집이 되느니 시신이라도 온전하게 여기서 눈을 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형님이 떠올랐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순례도 떠올랐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떠오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차가운 강물은 내 정신을 더욱 또렸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저 걷고 걸을 뿐이였다. 물쌀에 쓸려 휘청거릴지라도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윽고 반대편 강가로 몸을 빼낸 후에야 정신이 몽롱해짐을 느꼈다. 다가오는 사람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른채 그저 입에서 나는대로 중얼거릴 뿐이였다.
“oo중대 oo소대 이소하... oo중대 oo소대 이소하... oo중대 oo소대 이소하...”
며칠 뒤 후방의 한 국군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저체온증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몸을 회복하는 동안 부모님과 형님께 그저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돌아 가야할 의미를 부여해준 순례에게도 그저 고마울뿐이였다.
단순히 할아버지의 재치있는 판단에 의해 어려움을 헤쳐나간 것이 아닌, 만주에서 피난길에 오르셨을 때의 경험을 교훈 삼아 탈출에 성공하셨던 일화입니다. 급한 마음에 강물에 뛰어들었다면 참방거리는 물소리 때문에 오히려 위험한 상황이 될 뻔했지만 지난 형님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던 경험이 강물 아래로 건너가야한다는 채치를 발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괜시리 그때 일이 생각나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고 먼저 가신 분들께서 할아버지를 지켜주시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마침 오늘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과 그분들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분들이 아픔없는 곳에서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