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나는 괜스리 너그럽다. 너그럽다 못해 불평이라는건 진즉에 사라지고 마냥 좋기만 하다. 더불어 비판의 이성과 함께 세밀한 감정이라는 것도 함께 사라져버린 듯하다. 좋은건가, 아닌건가.
예전의 나는 너무 뜨거웠다. 삶이 치열했고 감정에 너무 가까이 기대어 살았었다. 내 주관과 판단이 우선되어 세상과 사람들을 내 잣대로 재기에 바빴었다. 속으로는 그렇다 해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다보니 세상과의 거리감을 좁힐 형편도 되지 않았었다. 그때 도망친 곳이 소설과 영화였다.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의 위선이자 위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내 심장은 불같이 타오르기 일쑤였고 내 허파는 뜨거운 불길속에서 숨조차 쉬기 힘들 때도 있었다.
물론 요즘도 버럭하는 경우는 있지만 빈도와 횟수는 절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뭔가를 할 만큼은 되지 못하지만 그저 몸에 익히게끔 자주 생각하고 다짐하며 하나하나 체득한 후 습관을 만드는 방법을 취해본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변화에 집중하고자 할 무렵 운동을 만났고, 외적 내적 변화가 동시에 찾아왔다. 운동을 해본 분들은 알 것이다. 운동을 마친 후에 맞이하는 통렬함과 짜릿함, 그리고 넘치는 에너지... 이것들은 으례 삶의 희열을 동반한 행복을 휘두르며 나타난다. 깊은 곳 저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름을 느끼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비움과 채움의 과정을 반복함에 따라 내 마음속에서 여유로움이 찾아지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면서 생긴 육체적 변화도 한 몫을 한것 같다. 체력이 상승하고 군살이 제거되고 피부가 맑아지면서 자신감도 함께 상승한 이유도 있었다. 말그대로 자심감은 여유를 낳고 여유가 관용을 낳은 케이스랄까. 다행히도 요즈음 나의 키워드와 딱 맞아떨어져서 기쁘다.
언젠가부터 해를 거듭할 때마다 다짐하는 것이 있다. 바로 '관용의 미덕을 실천하자'라는 것이다. 관용이라는 부분은 내 마음의 평온(평이)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 또한 갖추어야만 내 안에서 요동치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다스릴 수 있다. 관용은 내 안에서 넘쳐나야 타인에게도 닿을 수 있다. 우선 나 자신에 대한 관용을 무수히 연습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로 향해 있는 감정선에 몇가닥 희망과 관용의 색을 입혀본다.
그런데, 와중에 하나의 부작용이 감지되기도 한다. 변명일수도 있겠으나 나의 촉수는 무뎌질대로 닳아져버려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 길게 이야길 하지 못하고 글로도 써지지 않는다. 평소 너무 명랑한 탓에 글이 모두 현실에서 세 뼘쯤 방방 떠있다는 것도 문제다.
영감은 커녕 찌릿하게 울리는 감성을 한조각도 건져올리지 못한다. 그저 유예된 감정을 뒤로 하고 직관적인 기술만을 할 뿐이다. 요즘의 나의 일기가 그러하다. 기분 좋게 한잔 걸친 날에야 겨우 고개를 빼꼼히 드는 날선 감성에 기대어 끄적끄적 한탄 비슷한 멜랑꼴리 글이 그려질 때는, 심지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까지 한다. 모두 관용이 나은 부작용이라 칭해본다.
최근의 나의 모습과 글을 보면 바람 빠진 풍선, 늘어난 고무줄, 무딘 칼날을 떠올리게 된다. 어제 내가 오마주를 하며 나의 지난 날들을 돌아본 결론이다. 또 하나의 고민이 밀려온다. 무딤과 날섬의 양날을 가질 수는 없을까?
글 말미를 빌어 순국 선열들에게 묵념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