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알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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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책에 알러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책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대한 알러지다. 도서관이나 중고서점 같은 곳이다. 증세는 대략 재채기와 콧물, 간지러움, 어지러움등이다. 가장 참기 어려운 증상은 머리를 세게 조이는 듯한 압박감이다. 마치 강도가 어마어마한 탄력스타킹을 머리에 뒤집어 쓴 듯한 느낌이다.

어린 시절 꼭 가보고 싶었으나 못 가본 곳이 있는데, 바로 '만화방'이다. 쾌쾌한 향이 묻어나는, 때묻은 소파들로 어지러웠던 집앞 만화방은 만화가이던 사촌언니의 손을 잡고 몇번 찾아가본 걸 빼고는 가본 적이 없다. 여지없이 재채기와 콧물이 방해했지만, 당시 난 그 언니를 참 좋아라 했기 때문에 나의 약점을 언니에게 보여서는 안되었다.

이러한 알러지 증상은 대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시작된다. 마치 금지된 구역의 경계선을 넘어 첫발을 딛자마자 경고의 부저가 울린것처럼 공기의 변화를 바로 감지한다. 학교앞 골목 깊숙히 자리 잡고 있던 일명 불온서적을 거래하는 헌책방에 들어가자마자 재채기가 연속해서 나왔다. 인심좋게 생긴 아저씨는 걱정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었다. 학교 도서관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코랑 눈이 간지러워 오래 자리를 지킬수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봐 콧물을 연신 휴지로 찍어내고 눈이 벌개지도록 비비다가 가방을 챙겨 나오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간을 파는 서점에 가면 이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것에서 나는 책향기는 나무의 그것처럼 알싸하니 좋았다. 여타의 알러지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다. 타인의 손길이 닿기 전인 순수한 상태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책은 새걸로 구입해서 보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집에 장식용으로 책장을 들여 놓고 책을 꽂아 놓고 감상하는 취미도 생겼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한국에 있을때는 미련스럽게 새책만을 고집할수 밖에 없었다. 중고책은 커녕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해외에 나와 산 뒤로부터는 책을 쉽게 사볼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서 어쩔수 없이 남이 보던 책을 빌려보게 되었는데 이때 또 다른 매력이 발견하게 되었다. 책에서 맡게 되는 낯선 향기 혹은 낙서 혹은 맨앞, 맨뒷페이지에 써 놓은 글귀, 그리고 군데군데 보이는 생활 얼룩과 모퉁이를 접어놓은 페이지들이 책의 원주인과 책을 읽고 있는 풍경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왜 이 책은 어쩌다가 한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된걸까. 이 얼룩은 커피일까, 코피일까. 쭈글쭈글한 이 면을 만든건 눈물일까 물일까. 이 페이지의 매력은 무엇이라서 접어 놓은것일까. 다행히 개별 중고책에 대해서는 알러지 반응은 없었다.

남이 보던 책을 보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 날, 나는 활자 중독 증세를 보이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나의 책 알러지가 시작된 시점은 아마 그때부터인것 같다. 어릴때 살던 집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그 보물 창고같은 작은 공간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여러가지 비밀들이 있었다. 남의 인생을 엿보기라는 재미를 처음 발견한 것이었다. 다락방 안을 꽉 채운 여러 개의 커다란 마분지 박스안에는 오래된 책과 잡지, 성적표, 교과서, 공책, 일기, 편지 등이 마구 쑤셔 넣어져 있었다. 모두 큰오빠의 물건들이었다. 지금도 나에게 영원한 히어로인 큰오빠의 학창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물건들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를 만큼 나는 매일 그곳에서 나의 활자 욕구를 채우고 있었고, 그때 얻은 것이 바로 이 알러지가 아닌가 싶다.

먼지가 책만큼 많았었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그만큼 먼지로 꽉 차 있었던 것도 같다. 손바닥 두개만한 작은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석양 빛에 의해 먼지가 윤곽을 드러내곤 했는데, 그때 난 그 정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새로 박스를 하나씩 개봉할 때마다 확 피어오르는 그 녀석들이 아름다워서 그냥 넋 놓고 쳐다보았던 기억도 살짝 난다. 부유하는 수만개의 알갱이들이 그저 춤추는 것처럼 몽환적이고 엄청 신기해보였다. 그렇다고 그 많은 먼지를 마시면서 머리가 아프거나 기침이 나거나 목이 아팠던 적은 없었다. 다만 엄마가 감추어 놓은 홍시를 여러개 훔쳐 먹고 일주일 동안 화장실을 못가서 엄마한테 된통 혼났던 기억은 있다.

아무튼 나의 책 알러지는 이렇도록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나는 자랑스럽게도 책 알러지가 있다고 주변인들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왠지 내가 공부를 못하는, 도서관을 못가는 그럴싸한 이유들이 만들어져서 으쓱해지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책에만 알러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년 전에 일본식 소품 가게를 누군가를 따라서 방문한적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느끼는 이 익숙한 느낌! 머리를 꽉 조여오며 뱅뱅 도는 이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돌아보니 책은 한권도 없고, 자잘한 일본식 악세사리, 미니어처, 피규어들로 꽉 찬 집이었다. 한번 휙 돌아보고 3분도 못되어서 뛰쳐나왔다. 그렇담 나의 알러지의 정체는 책이 아닌 먼지였더란 말인가.

결국 콧물 재채기의 원인은 어이없게도 '먼지'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누구에게든 알러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멋지지 않잖아. 먼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꼴이라니. 그래도 혹시 누군가가 "당신은 어떤 알러지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난 책을 좋아하지만, 책 알러지가 있어요!"라고 대답하고 싶다. 좀 폼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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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알러지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