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진동칫솔이 생겨도 칫솔은 사라지지 않았고,
라이터가 생겨도 성냥은 사라지지 않았다.
양초 역시 ‘사라지지 않은’ 사물 중 하나다.
전구가 발명되자 사람들은 양초의 몰락을 예상했다.
그러나 양초는 여전히 우리 삶 깊숙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떻게 양초는 과학기술이란 거대한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최근 ‘소이캔들 열풍’이 불고 있다.
라벤더, 재스민 등 온갖 향기가 나는 양초가 사람들의 방에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양초에 열광하는 이유는 향기 때문만이 아니다.
향기를 원한다면 디퓨저나 향수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사람들이 굳이 양초를 구매하는 이유는
그들이 양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 할지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감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감성'을 원한다
양초와 형광등은 자신의 주변을 밝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양초의 ‘불꽃’과 형광등의 ‘빛’은 완전히 다르다.
형광등의 빛은 기계의 성질을 띤다.
투명한 유리관에 갇힌 빛은 무감정하고 객관적이다.
형광등의 빛은 어둠을 완전히 배척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형광등을 끄고 자는 것이다.
형광등과는 달리, 우리는 양초를 켜놓고도 불편하지 않게 잠을 잔다.
양초가 인간과 가까운 사물이기 때문이다.
양초는 인간의 성질을 띤다.
‘결국은 사라진다’는 필멸성은 인간이 가진 성질 중 하나다.
완전히 녹아내린 양초의 모습은 우리에게 죽음을 연상시킨다.
불꽃을 키우며 타들어가는 양초의 심지 역시
하루하루 생을 다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다.
또한 양초는 상대적인 공존을 이루는 사물이다.
양초의 불꽃은 어둠과 공존한다.
양초를 켜놓고 바라보면, 양초의 주변으로 더욱 선명해진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양초는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킨다.
사람들은 양초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상대적인 공존을 연상한다.
그곳에 죽음이 있기에, 이곳에 삶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양초의 불꽃은 형광등처럼 유리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래서 양초의 불꽃은 마치 인간의 감정처럼, 주위의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
이처럼 양초와 인간의 유사성은, 양초에서 인간 자신을 연상시킨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초의 불꽃은 ‘인간을 끌어낸다.’
사랑을 위한 이벤트에서 양초가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소품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양초를 켜면 분위기가 산다고 말한다.
분위기란 결국 인간이 느끼는 기분이다.
양초의 불꽃은 인간의 내면을 자극해서 내면 깊숙히 숨겨져 있는 것들을 끌어낸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인간’을 느끼게 만든다.
형광등의 빛이 눈이라는 인간의 외면을 자극한다면,
양초의 촛불은 인간의 내면을 자극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 앞에 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촛불은 단순한 추모의 의미를 넘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서 ‘인간’을 이끌어낸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의 빈자리를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채웠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에서 여전히 멸종하지 않은 양초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감성’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