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는 세계대전 후 미국의 노동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학적 경영을 표방하는 테일러주의와 포
드주의가 도입되었다. 기계적인 반복공정으로 최소의 생산시간으로 최대 효율최대 수익을 내는 방식이 일반
화되었다. 인간을 기계 부품화시킨 역사였다.
채플린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
정해진 시간안에 모든 걸 마쳐야만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옆에서 동료가 미쳐가거나 죽어가는 것도
알지 못했고 무관심해졌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죽이고 동료를 버린 것이다.
헨리 치나스키는 드디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보궐 집배원. 현장 감독의 지독한 괴롭힘을 참아내
며 엄청난 체력과 투지로 비정규직 집배원의 일을 묵묵히 했다.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한 후 자정
넘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에 섹스를 하고 다시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무거운 우편물을 짊어지고 하루 12시간
또는 초과근무 배송을 했다. 주어진 물량을 다 배달하기 위해 점심을 거르기 일쑤였다.
최고령 집배원 GG는 정신과 신체의 노화로 집배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동료 집배원들 모
두 그를 좋아하고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은 했지만, 정작 GG가 위기에 처한 순간에는 모두 모른 척 했다.
치나스키가 소리쳐 GG가 위기상황임을 알렸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를 집에 데려다주고 그가 못한
일을 대신하겠다고 치나스키가 나섰지만 현장주임은 곧바로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 버렸다. 이런 비인
간적이고 철인을 요하는 환경에서 3년을 버틴 후 마침내 정규직 집배원이 되었지만, 현장감독의 말도 안되
는 규정을 운운하며 경고장을 남발하는 통에 사표를 내버린다.
36살에 만난 23살의 조이스가 졸라서 결혼을 하고 그녀의 고향에 가서 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많은
유산과 집을 가진 여자였다. 치나스키는 배고플 걱정 없고 여유로운 시골생활이 좋았지만 조이스의 고집으
로 다시 도시로 돌아왔고 시험을 쳐서 우편 사무원이 되었다. 2백여명이 입사를 하지만 최종 2명밖에 남지
않는 일자리였다. 대화는 허용되지 않고, 감독의 감시 하에 8시간 동안 단 두 번 10분씩 쉴 수 있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은 모두 기록되었다. 치나스키는 23분만에 60cm 트레이 하나를 해치워야 하는 추가 수당 없는
12시간 야간 근무를 마치고 귀가해, 피로와 졸음 속에 색광 아내를 만족시켜야 했다. 치나스키는 알고 보면
동물 애호가에 페미니즘 지지자라고 할만큼 동물과 여자에게는 무조건 보호본능이 일어나는 따뜻한 사내였
다.
에곤 실레
아내 조이스는 경찰 사무원이 되었고 바람둥이를 사랑해서 치나스키와 이혼했으나 그 멋진 남자는 되레 도
망 가버렸다. 이혼 당한 치나스키는 우연히 과거의 연상 동거녀 베티를 만나 하룻밤을 보냈으나, 둘은 이미
늙고 변했고 더 이상 과거의 두 사람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베티의 전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두 아들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베티는 허무한 삶이 버거워 술을 마셨고 폭음으로 죽었다. 불행한 그녀의 임
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뤄준 것은 가족이 아닌 치나스키였다.
그렇게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술과 경마와 섹스로 시간을 보내다가 반전주의자 이혼녀 페이를 만났다. 페
이는 전남편과 어머니로부터 돈을 받아 근근히 생활했으나 직업을 얻지 않고 집안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그저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작가 워크숍을 다녔다. 실직한 그녀의 전남편을 우체국에 취업시켜주겼다고 말
하자, 전남편은 고상해서 그런 일은 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여자다.
페이는 임신을 했고 이쁜 딸을 낳았다. 마리아 루이즈 치나스키. 드디어 그에게 자식이 생긴 것이다. 페이는
아이를 돌보지 않는 엄마였다. 페이는 일방적으로 딸을 데리고 집을 얻어 나갔고 딴 남자를 잠시 만났다. 얼
마 지난 후 페이는 먼 뉴멕시코 히피공동체에서 딸과 살고 있다는 편지와 그림을 달랑 보내왔다. 치나스키는
아버지로서 딸을 사랑했지만 일방적으로 이별통보를 받아버린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11년이라니! 처음 여기 왔을 때보다 땡전 한 푼 늘지 않았는데. 11년. 매일 밤이 길긴 했어도 세월 참 빨리 흘
렀다. 어쩌면 야간작업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똑같은 일을 하고 , 또 하고, 계속하기 때문일 수도 있
다. 여기서는 놀랄 만한 사건도 없었다.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 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
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난 못 버틸 거야." 지미는 내게 말했
다.
사람들은 녹아 버리거나 살이 뒤룩뒤룩 쪘다. 특히 엉덩이와 배가 비대해졌다. 줄곧 스툴에 앉아 있어야 하고
같은25동작과 같은 걸음걸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됐다. 어지럼증이 생기고 팔, 목, 3가슴,
영혼의 자유(leichelle)님을 이웃추가하고 새글을 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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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일하려면 좀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종일 잠만 잤다. 주말에는 일을 잊기 위해 술
을 마셨다. 여기 올 때는 84킬로그램이었다. 지금은 101킬로그램이었다. 고작 오른 팔만 움직일 뿐이니까.
이 대목을 읽을 때는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기분이었다. 직장에 목 매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뭐가 다른가. 생산라인에 삶을 꿰맞추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현대라고 해서 별 다르지 않다. 한때
‘시간경영’이라고 해서 회사 여기 저기에 뭐 하는데 몇초, 몇분이 소요된다는 표시판이 널려있었던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요줌에도 S기업 화장실에는 손 닦는 티슈 한장에 얼마라고 써붙여 있단다. 이젠 시간관
리 + 원가절감의 시대.
어쩌다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난 아이 양육비도 내야 하고, 술값, 집세, 신발, 양말 따위도 필
요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중고차라도 있어야 하고 입에 풀칠도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무형의 필수품들도 필
요하다. 여자들이라든가, 아니면 경마장에서 보내는 하루라든가. 그렇지만 모든 것이 위태롭고 빠져나갈 출
구가 없으면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다.
우정사업본부 건너편 거리에 주차를 하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길을 건넜다. 회전문을 열었다. 자석에
끌여가는 철 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치나스키는 12년을 근무하고 쉰살을 8개월 앞두고 사직했다. 별로 달라진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깊
은 바다에서 너무 빨리 나온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특수한 유형의 잠수병이었다.
나는 조이스가 길렀던 빌어먹을 잉꼬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새장안에 갇혀 살다가 문이 열리자 날아올랐던 것
이다. 마치 천국으로 쏘아 올린 총알처럼.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
사직 후 그는 줄곧 고주망태로 지내다가 목에 식칼을 대기까지 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니 팔목에 담뱃불을
지지며 웃고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파티가 열렸고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의대생은 그의
척추가 14군데나 엇나가 긴장과 무기력, 광증을 유발한다고 경고했다. 그런 정신 나간 시간이 술과 함께 흘
렀고 마침내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파블로 피카소
앞서 읽은 부코스키의 작품 Ham on Rye Factotum 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우체국>을 읽으서야
왜 미국인들이 안티히어로의 대표로 부코스키를 꼽는지 이해되었다.
세상의 부조리함에 투쟁적이진 않더라도 쉽게 굴복하고 함몰되지 않는다. 자기 삶의 테두리 안에서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적하고 일자리마저 던져버리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대다수가 복
종하는 세상에 맞서고, 삶의 민낮 그대로 군더더기 없이 까발리는 그의 글에서, 미국인들은 통쾌함을 느꼈을
듯하다.
에곤 실레의 실생활은 외설스러운 그의 그림과는 반대였다는 것이, 엉망진창의 생활 속에 내면의 따스함이
살에곤 실레의 실생활은 외설스러운 그의 그림과는 반대였다는 것이, 엉망진창의 생활 속에 내면의 따스함이
살아있던 치나스키의 소설과 닮았다. 또한 가난과 친구의 죽음으로 절망적인 우울 속에서 지냈던 피카소의
청색시대 작품이 이 소설 속 여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치나스키가 느꼈던 슬픔과 닮아 있고, 슬프고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묘한 유쾌함이 깔려 있던 소설의 마지막이 가난에서 벗어나 유명세를 떨친 시절의 피카소 작 품
이 주는 느낌과 왠지 닮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