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 PD(이하 '김'): 교수님, 오늘은 어떤 책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정선태 교수(이하 '정'): 제가 박노해 선생의 시는 몇 번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은 사진에세이입니다. 박노해 선생은 시인으로도 유명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반전평화운동, 생명운동쪽에도 투신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고통받는 땅들을 다니며 '빛으로 쓴 시'인 사진과 직접 쓴 에세이를 엮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2007년 폐허의 레바논 전쟁터에서 평화활동 중인 박노해 시인
19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는 민주투사이자 저항시인이었고, 사형을 구형 받고 무기수가 되어 7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민주화 이후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과 정치의 길을 거부하고 묵묵히 스스로 잊혀지는 길을 택했다. 지난 20여년간 ‘지구시대 유랑자’로 전 세계 분쟁 현장과 빈곤 지역, 지도에도 없는 마을들을 두 발로 걸으며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진실을 담아왔다.
정: 2010년 출간한 사진집 『나 거기에 그들처럼』은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의 지도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는 곳을 다니며, 그곳의 삶이 숨쉬는 모습을 찍고 그 모습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어둡고 그늘져 보이는 곳을 찾아다니는데, 그곳에 살아 숨쉬는 삶과 생명은 인간의 오래된 미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미래란, 인간의 미래는 먼 미래에서가 아니라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제가 오늘 소개할 사진에세이 『다른 길』에서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디아, 티베트 등 식민지, 독재, 전쟁, 자본이 곳곳을 할퀴고 간 나라들을 방랑자처럼 돌아다니며 카메라에 담고 거기 담긴 모습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깊고 슬프고 쓸쓸하기도 한 책이어서 우리 청취자 여러분께 꼭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제가 본 사진집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먼저 인도네시아 부분을 보겠습니다. 인도네시아 하면 화산과 커피를 떠올리죠. 그런데 이곳 역시 식민지배, 군부독재, 소수민족 독립운동까지 격동의 역사가 스쳐갔습니다. 그만큼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고요. 그런 와중에도 이곳 사람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진에세이의 특징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렌즈를 맞추고 있습니다.
<화산의 선물>이라는 사진을 보겠습니다.
이곳에서 두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화산이 보이고 옆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세계에서 화산火山이 가장 많은 나라
인도네시아는 풍요로운 ‘불의 땅’이다.
화산은 두려움과 선물을 동시에 준다.
화산이 폭발한 자리에 탄생한 비옥한 대지는
혁명 같은 격동이 준 위대한 선물이다.
“우리는 화산의 선물로 살아가고 있으니
나 또한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야겠지요.”
저 높고 깊은 곳의 농부는 허리 숙인 노동으로
이 무너지는 세상을 묵묵히 떠받치며
자신의 등을 딛고 인류를 오르게 하는
빛의 디딤돌만 같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26~27p 중에서)
비탈진 언덕에서 노동하는 농부의 등을 보면서 자신의 등을 딛고 인류를 오르게 하는 빛의 디딤돌만 같다고 말합니다. 사진도 감동적이지만 글도 감동적입니다. 사진 한 장 한 장 보면서 글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우리가 몰랐던, 잊고 있었던 세계, 우리가 지나온 아득한 옛날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찻잎을 따는 이마스>라는 사진도 있습니다.
어떤 소녀가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있습니다.
저 힌두쿠시 산맥을 넘으면 아프가니스탄이다.
오늘도 미군의 무인폭격기는 차가운 폭음을 울리며
아이들의 몸을 가르고 가족의 생사를 갈라놓는다.
아직 걷지 못하는 어린 양을 품에 안은 어머니는
“이 어린 양도 제 어미와 동무들과 떨어지면 안 되지요.
가족을 떨어뜨리고 이웃을 갈라놓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선한 일이 아니지요.”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92~93p 중에서)
이 사진 한 장이 던지는 울림이 대단하지요. 여기서는 미군의 무인폭격기라고 이야기하는데 아이들의 몸을 가르고 가족의 생사를 갈라놓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어머니는 어린 양을 품에 안고 가족이든 이웃이든 갈라놓는 모든 것은 선한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관심을 기울이는 지점은 전쟁과 난민, 노동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난민이 머무는 곳에 깊이 오랫동안 시선이 머무는 것 같습니다.
<아프간 난민촌 소녀의 꿈>
허물어질 듯한 집에 나무가 몇 그루 있고 소녀가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 사진입니다.
파키스탄에는 160만의 아프간 난민이 살고 있다.
국경 인근의 유서 깊은 페샤와르는 ‘꽃의 도시’라는 뜻인데
지금은 ‘총의 도시’가 되어 하루걸러 총성과 폭음이다.
고향에서 피난 올 때 엄마가 품고 온 어린나무에
소녀는 매일같이 물을 주며 귀향의 날을 기다린다.
“아프간 제 고향으로 꼭 초대할게요.
달콤한 석류랑 포도랑 살구 케이크랑 듬뿍 먹고
우리 함께 파란 하늘에 연을 날려요.
이 나무가 제 키만큼 자라면 꼭 돌아갈 수 있겠죠?”
아, 기다림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만 리 길도 걸어간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106~107p 중에서)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을 지나서 라오스로 갑니다. 라오스 역시 전쟁의 슬픔으로 가득한 곳이죠. 이곳에서 수많은 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힘겨운 역사를 통과해왔고요. 그럼에도 이곳에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오스에서 주목한 사진은 서까래에 매달린 옥수수입니다. 아마 종자로 쓰기 위해서 매달아놓은 듯 합니다. 지금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옥수수를 말려서 씨앗을 뿌리면 자라서 다시 옥수수 열매를 맺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게 하는 거 아시죠. 이른바 '터미네이터 종자'라고 해서 몬센토나 종자회사에서 한번 뿌리면 씨앗이 나지 않게 하는 종자를 강제로 판매하는 일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GMO도 무섭지만 종자를 독점하는 국제적 종자기업도 심각한 문제죠. 그 파괴력은 씨앗을 말려버리는 지경으로 치닫는 것 같습니다.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옥수수를 매달아놓고 다음에 뿌릴 모양인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풍경이 선하게 떠오르는데요.
종자로 쓰려는 것은 그 해의 결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만을 골라 매달아진다.
수백 수천의 옥수수 알들은 단지
한 톨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
씨앗이 할 일은 단 두 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대지에 파묻혀 썩어 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진정한 자신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194~195p 중에서)
정: 그런데 우리는 씨앗마저 종자회사에 팔아버린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김: 세상에 이런 것까지 다 자본에 귀속이 되다니 서글퍼집니다.
정: 정말로 약탈적이고 파괴적입니다. 씨앗이 갖는 의미, 상상력의 진원 같은 역할이 있지 않습니까. 씨앗을 다 독점하고 생식이 불가능한 씨앗을 만들어냅니다. 일회성 씨앗이죠. 지속성, 영속성이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이러다 동물은 물론이고 인간까지 제조하는 날이 멀지 않았음이 우울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죠.
김: 지금 뭐 사실 인간을 복제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 그러게 말입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하죠. 윤리문제 때문에 멈칫거리는 것 같은데, 틈만 보이면 인간도 얼마든지 복제해낼 겁니다. SF 고전인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예고하지 않았습니까.
김: 인간을 복제하면 복제된 인간을 하나의 인격으로 우리가 존중할까요?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생물학적인 인간 복제도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정신적 복제도 그에 못지 않게 무섭다고 생각해요. 정신적으로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것, 표준적이고 획일적인 모습으로 대량생산하는 것도 무시무시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무늬, 삶의 무늬들을 깡그리 표준화해버리려는 자본의 무시무시한 전략의 일환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합니다.
버마로 가보겠습니다. 우리가 미얀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군부독재가 이름을 바꾼 것이고 오래 전부터 내려온 역사적 이름인 버마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이 버마 역시 영국의 식민지와 독재 때문에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죠. 지금은 자본의 독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버마 사진도 정말 감동적인 게 많은데 <사탕수수를 수확하는 소녀> 골랐습니다. 크게 자란 사탕수수를 수확하는 소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버마의 3월은 사탕수수 수확이 한창이다.
키 큰 사탕수수밭을 날랜 전사처럼 누비며 검무를 추는 듯
섬세한 손놀림으로 종자를 수확하는 마 틴 짜우(17).
불볕 아래 거칠고 고된 하루 노동으로 1,500원을 번다.
“이 줄기를 땅에 심으면 마디에서 수직으로 새싹이 돋아요.
첫 비가 내리면 키가 훌쩍 자라고 달콤한 설탕이 나오지요.
꿈결에도 흙에 묻혀 다시 돋는 푸른 바람 소리를 듣곤 해요.
그래서 전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아요.”
달콤한 설탕 한 알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고가 배어 있는지.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224~225p 중에서)
정: 열일곱살 소녀 노동자가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있는 사진과 함께 이렇게 에세이를 적어놓았습니다. 이처럼 이 사진에세이집에는 박노해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다른 풍경으로 자리잡은 사람들의 모습, 노동하는 사람들,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깊은 울림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디아도 예외가 아니고 티베트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티베트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티베트도 역시 '인류정신의 지붕'이라고 하지만 중국이 강제점령한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죠. 중국식 자본주의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전통도 삶도 다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원의 쟁기질>
어떤 농부가 소를 몰고 쟁기질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공기도 희박한 고원의 대지에서 청보리밭을 간다.
티베트에도 경운기와 트랙터가 보급되고 있지만
동력기계를 쓰면 땅이 굳고 생명력이 죽어가기에
말이 끄는 작은 쟁기질로 말랑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삶에서 가치 있는 것들은 이렇게 꾸역꾸역
불굴의 걸음으로 밀어가야 한다는 듯이,
쟁기를 잡은 농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336~337p 중에서)
정: 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눈길을 사로잡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떻습니까? 김 PD도 이런 책을 책상에 두고 읽고 싶죠? 스마트폰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가끔씩은 지하철 안에서 이런 책도 우아하게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김 PD에게 권장하는 사진 한 장 소개하겠습니다.
<밀밭 사이로 걷는 독서>
당나귀를 몰고 가는 열 다섯 살의 소녀가 책을 보고 있습니다. 아득한 '소리 풍경'(음경) 속에 책을 읽으며 당나귀 풀을 뜯기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햇살이 부드럽게 기울 때쯤이면
누비아(15)는 당나귀에게 풀을 먹이며
밀밭 사이로 ‘걷는 독서’를 한다.
들꽃의 향기와 밀싹의 숨결과 새의 노래가
낭송의 음경音景 속에 가만가만 스며든다.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삶을 읽고 세계를 읽고
자기 내면에 쓰여진 비밀스런 빛의 글자를
몸의 여행으로 읽어나가는 ‘걷는 독서’.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148~151p 중에서)
정: 이 방송 들으시는 많은 분들 박노해 시인이 쓴 사진에세이 『다른 길』과 사진집 『나 거기에 그들처럼』을 보시면 우리가 몰랐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 잃었던 언젠가 찾아야 할 모습들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름다운 에세이와 함께 말이죠.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나며
박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