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밤늦게 겨우 숙소를 구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인터넷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게스트하우스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갖고 있었다. 투숙객과 같이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띄워주는 숙소 주인, 오후 9시가 조금 넘어서 깔끔하게 끝나는 술자리,
술자리에서 생각하는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 제주도에 자전거 일주하러 왔다가 박물관 한 곳은 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지도에 찍힌 '생각하는 정원'이라는 이름만 보고 '그래, 저기 가서 생각을 정리하는거야' 따위의 결심으로 반나절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갔더니 수석 전시장 겸 정원이었다고. 그래서 '내가 왜 알아보지도 않고 여기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그는 무척 후회하지만 의외로 그런 경험이 더 기억에 남아서 지금은 다녀오길 잘했다고 한다.
술자리가 끝나고 침대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생각하는 정원' 투숙객이 내게 '주인 아저씨하고 한 잔 더 할래요?'라고 묻는다. 짧은 술자리가 아쉬워할만한 사람들에겐 살짝 귀띔해서 조용하게 한 잔 더 하는거라고. 거기서 백석동이니 흑석동이니 상암이니 뭐니 하는, 내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갈 가능성이 전무한 곳들에 대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굳이 화제를 돌리지 않았다. 여행길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화제가 바뀌어 대구나 경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미래소년코난의 인더스트리아나 하이하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미세하게 흔들렸다.
깔끔하고 친절했고 친근했다. 아마 주인이 젊고, 어린 스태프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 숙소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후에도 제주도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씩 더 갔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내와 갔을 때는 갑자기 몸살난 아내를 보고 급히 약을 구해주기도 했다.
날이 밝았으니 어쨌든 다시 나서야했다. 오늘의 목표는 근처에 있는 감귤박물관과 쇠소깍을 거친 뒤 제주항 방면으로 갈 수 있을만큼 가는 것.
감귤박물관까지는 오르막이었다. 자전거 짐칸에는 전날 밤에 대충 비누칠 해서 씻긴 했지만 아직 마르지 않은 온갖 빨래를 매어놨다. 혹시나 바람에 조금이라도 마를까해서... 허벅지가 건강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쉬엄쉬엄 올라가는데 가로수가 갑자기 귤나무로 바뀐다. 아, 이제 거의 다 왔구나.
뒤의 언덕으로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와서 산책하기 좋아보였다. 차로 왔으면 한 번 올라갔겠지만 일단 오르막은 이제 그만.
실제 다양한 종류의 귤류를 키우고 있기도 했고 설명이나 디오라마도 자세했다. 초등학생 쯤 되는 아이가 있으면 오기 좋은 곳 같다. 귤의 학명들에는 왠일인지 거의 다 일본어의 느낌이 묻어났다. 한라봉의 기원은 일본 농림청이 만든 '시라누이'라는 것도, 우리가 먹는 귤의 베이스가 되는 온주감귤은 박정희 정권 때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것도, 진귤이라 불리는 350세의 귤나무가 애월에 있다는 것도 여기가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이다.
이건 파인애플의 배신이다. 너 땅에서 솔방울처럼 자라는 놈이었구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뒤 온실을 나서 전시관으로 향했다.
지역작가들의 서각 전시회 공간도 있고.
제주 지역 전통가택의 모형도 있고.
예로부터 돼지를 잘 키우기 위해 제주지역에서는 히터 옆에 돼지우리를 지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뜬금없이 나타난 토끼를 보며 너는 귤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말도 걸어보고.
다음 목적지는 쇠소깍. 제주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내리막길만 간다. 귤 박물관을 나온 이후로 동네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귤박스에서 자주 봤던 효돈이 이 동네였구나.
개울물 바닥이 점점 갈라지고 깊어지기 시작하더니 바닷물과 만났다.
대기시간이 한 시간 정도. 굳이 혼자서 청승떨며 강바닥을 보며 노를 젓고 싶지는 않았다. 페달 밟는걸로 충분해. 이 때 입은 티셔츠는 그 전에 묵은 민박집에서 이불장 뒷편에 구겨져 쳐박혀 있던 걸 주워온 것이다. 비 올 때 가방 윗부분을 덮을 용도로 갖고 왔는데 빨래는 마르지 않고 입을 옷은 없고.. 흠흠. 그런거지 대구거지.
날씨가 심상치않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달려야한다.
별 생각없이 페달만 밟는다. 풍경도 이제 고만고만하다. 중간에 몇 번 소나기를 맞았다. 가방 위에서 잘 마르던 빨래들이 다시 젖었다.
제주도 들어오는 배에서 만났던 사람을 길에서 다시 만났다. 혹은 혼자 쉬고 있는데 괜히 옆에 와서 말을 걸던 사람을 나중에 부산으로 나가는 배에서 다시 만났다.
"같이 달리실래요? 저는 오늘 ㅇㅇ까지 가서 숙소에 묵을 예정인데.."
"아니오, 저는 혼자 천천히 가는 게 좋아서요."
라고 덤덤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익혔다. 사실은 내 자전거는 유사 산악용 자전거라 바퀴가 넓고 마찰이 커서 빨리 달리는 게 힘들어서 그의 로드바이크를 따라가기 너무 거절했지만.
그가 먼저 출발하고 5분쯤 지나고 혹시나해서 전력으로 달렸지만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같이 가자고 했으면 괜히 속도 맞추느라 서로 귀찮았겠지.
이슬비를 찔끔찔끔 맞으며 계속 달린다. 오늘도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에 숙소를 알아보기로 오기를 부린다.
해가 저물었지만 길이 잘 보이고 자전거 도로로 달리는 건 크게 힘들지 않기에 더 가기로 한다.
바다 멀리 고기잡이배가 보이는데 길보다 바다가 더 밝아졌다. 내 자전거 라이트로는 이제 바로 앞만 밝힐 수 있을 지경이다.
이제 너무 깜깜해서 더 가기 힘들다.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몇 군데서 퇴짜를 맞고 20~30여분을 더 가야하는 곳에 빈 방이 있다는 확인을 하고 다시 출발한다. 대구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리 반사테이프를 붙였는데 카메라 플래시를 잘 반사시키는 걸 보고 훌륭한 결정이었다며 혼자 흐뭇해하며 페달을 밟는다.
마침내 도착한 혼인지 부근의 숙소. 어르신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민박집을 개조한 느낌이었다.
이틀간의 이동 거리. 섭지코지에서 일출봉, 우도까지 도보이동 후 버스타고 서귀포로 이동, 서귀포터미널에서 혼인지까지 자전거 이동. 사실, 사흘이면 제주도 전체를 다 돌 수 있다. 사진이나 기억에서는 빠지고 희미해져서 여기 쓰지는 못하지만 나는 샛길을 참 많이 들어갔다. 이름모를 관광지에 입장료를 주고 들어갔다가 한두시간씩 보내기도 하고 바닷가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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