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할 때 라디오는 잘 듣지 않는다. 보통은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구질구질한 곡들을 반복재생한다. 주로 ABBA와 김광석으로 시작하여 90년대 가요와 팝송들인데 옛날 카세트테이프처럼 휴대폰 노래에도 내구연한이 있다면 그 노래들은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퓌가모좌롸 피가모좌라'스러운 늘어진 소리를 내고 있을 정도로 오래 들었고 많이 들었다.
어느날 라디오 전원버튼에 손을 한 번 댄 뒤로 며칠째 출퇴근길에 라디오를 듣고 있다, 항상 입으로는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뻔한 이야기들이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채널을 돌리다보면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만난다. 아쉽게도 이미 노래는 중후반부에 들어선 상태다. 매번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TV채널을 돌리다가 영화채널에서 마주친 영화는 항상 클라이막스를 방금 지난 상태인 것과 같은 원리인 듯 하다.
어쨌든 이미 중후반부에 들어선 노래는 길게는 2분, 짧게는 20초만에 끝나버리고 라디오 진행자의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나오거나 '오늘도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대종사 말씀하시길...' 따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운 좋은 출장길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라디오삼국지 같은건 재미있지는 않지만 재미가 없지도 않아서 그런대로 만족하며 듣는 편이고 '사랑하는 OO씨, 결혼기념일 어쩌고... 우리 자기 생일이 어쩌고...'하는 멘트가 나오면 라디오는 켜 둔 채 귀를 닫는다. 한마디로, 라디오는 항상 재미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라디오를 끄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집에 거의 도착해서 지하주차장에 차가 들어가면서부터는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을만큼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섞여들리다가 차가 완전히 땅속으로 들어가면 '칙----'하는 소리만 들리게 되는데 그 때부터는 라디오 내용이 미치도록 궁금해지는 것이다. 아까 하던 이야기에서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머리를 굴려 추측해보는데 답지가 없는 수학경시대회 문제를 푸는 것 만큼이나 의미없는 일이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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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동을 켜면서 '칙---'소리가 어제 오후와 이어져서 차에 가득하게 되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어제 듣던 채널이 아마 원불교 방송이었을꺼야. 이 시간이면 '대종사 말씀하시길..'인가? 아니야, 어제 KBS같은 메이저 채널이었던 것 같아. 그러면 '안뇽하세요! ㅇㅇㅇ의 파월타임!"이 나오고 있을거야. 으으음 지금 라디오는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걸까.
내가 이런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면서 차를 밟고 있으면 내 차는 갤갤거리며 움직여 어느새 앞유리로 햇빛이 들어와 얼굴을 덮는 동시에 라디오의 '칙---'소리는 사람의 소리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 나는 또 투덜거리며 라디오를 듣지 않지만 듣고 있는 상태가 된다. '아, 전파 아깝게 아침부터 무슨 이런 헛소리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