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시골지역에서 ‘유학’와서 기숙사에 살던 뒷자리 친구들이 싸우던 레파토리는 ‘니네 동네가 조금 더 시골이다’였다. 쌍방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기껏해야 점빵 혹은 구판장이 두 개냐 세 개냐, 동네 농협에서 비료만 파느냐 아이스크림도 파느냐의 차이 정도였지만 매번 순발력과 순간적인 재치로 승자가 정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싸움은 친구 A의 공격 ‘니네 동네엔 백화점 있냐, 우리 동네엔 있다’로 시작되었다. 친구 B는 패배를 선언하면서 ‘그런데 진짜 백화점 있긴 하냐’라고 따져 물었다. A의 대답은 ‘응, 가구 백화점하고 농자재 백화점’
다음 번 싸움은 B의 선제공격이 먹혀들었는데 ‘니네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몇 층이냐, 우리 동네는 4층이다’였다. A는 한참 생각하더니 작은 소리로 ‘2층.. 근데 니네 동네엔 진짜 4층짜리가 있냐?’라고 되물었다. B가 씨익 웃으며 답하길 ‘응, 사료공장의 사료탑이 4층 높이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던 날, 나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할 때 아이와 갈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가장 만만한 곳은 동네 어린이도서관이나 대형마트다. 우리동네 기준으로 그냥 구경만 갈 때는 집에서 더 가까운 홈플러스를, 시식이나 구매는 이마트를 선호한다. 최근에는 아이더러 ‘마트 구경갈까’라고 물어보면 아이가 ‘시식, 시식하러 가요’라고 답하기에 이마트를 가는 편이다.
전통시장 살리기의 일환으로 마트가 문 닫는 날이면 쓸데없는 오기가 저절로 솟아난다. 그 탓에 마트휴무일에는 절대로 전통시장에 가지 않는다. 결혼 전, 대구의 교동시장이나 칠성시장에 혼자 구경삼아 전자제품이나 과일 등을 사러 가면 시장상인들이 ‘아이고 총각(또는 젊은이), 오늘 싸게 해줄게’라며 날 불러 세워 가격을 말해줬고 나는 부르는 가격의 5~10%정도를 흥정해서 깎곤 했다. ‘이야, 젊은 사람이 야무지네, 총각한테만 내가 그 가격 해줄게’라며 싸게 주긴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흥정 없이 더 싼 가격을 부르는 게 문제였지만. 다른 아줌마들에겐 흥정 없이도 나에게 판 가격보다 더 싼 가격을 부르는 장면을 너댓번 목격하고 나니 왠지 내가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차라리 비싸게 사더라도 정가로 살 수 있는 마트를 선호하게 되었다. 가끔 내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구한 쿠폰이나 신용카드 할인으로 정가보다 싸게 살 때면 승리의 쾌감도 약간 느낀다. 그래봤자 3만원어치 필요한 물건을 5만원어치 구매하면서 5천원 할인받은 것이지만.
어쨌든 문 닫은 마트에는 갈 수 없고, 전통시장은 가기 싫고 결국 결론은 백화점이다. 집사람과 나는 둘 다 ‘촌놈 마인드’를 탑재하고 있기 때문에 백화점도 그냥 가지 않는다. 카카오 플러스 친구를 열어 무슨 쿠폰이 있는지 확인하고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서 백화점에 무슨 이벤트가 있는지도 확인한 뒤에야 결정을 내리는 편이다. 이 날은 백화점에서 공연하는 어린이용 연극표를 싸게 사고, 무료주차 2시간과 무료솜사탕, 무료회전목마, 무료무당벌레차 탑승권을 준비할 수 있었다. ‘지금 씻고 출발하면 오늘 한나절 수월하게 보낼 수 있겠구나’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출동명령을 내렸다.
넉넉히 예상하고 준비하였건만 아이는 넉넉한 시간보다 더 넉넉하게 물놀이스런 목욕을 즐겼다. 욕조에서 첨벙거리길 20여분.
오리를 씻겨주길 5분, 갑자기 멀쩡한 손수건을 가져다 달래서 손빨래 5분, 바가지로 물고기를 잡아 생선찌개 끓이길 5분. 혼자 물비누를 짜서 얼기설기 몸에 거품낙서를 5분. 온몸에 덮어쓴 거품을 보며 ‘나 거품 옷 입었어. 난 벌거벗은 임금님이야’ 따위의 경청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독백을 5분.
배가 고팠다. 아차, 먹스팀! 먹스팀 쓰면 보상액이 2불은 찍히던데. 1인세트가 1만원쯤이니 사실상 8천원!라고 생각하며 사먹은 짜장면은 맛이 없었다. 돈만 날렸다. 그냥 비빔밥 먹을걸.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때 백화점 어쩌고 들었던 게 생각났다. 1만원 긁고 500원 할인. ‘뭐 이런 것도 할인이라고’하는 투덜거려던 순간, ‘땅을 파봐라, 10원짜리 하나 나오나’라는 아버지의 명언이 함께 떠올랐다. 땅 파도 안나오는 500원, 감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