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어쩌다가 절집에 갈 일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법당에 들어가서 중앙에 앉아 있는 불상을 보며 기도도 하고 법당 내부를 둘러봤겠지만 이날은 발냄새가 좀 났던 날이라 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일행이 법당과 칠성각을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아이를 데리고 법당 외부를 거닐었다. 흔히 보이는 법당 벽화. 지금껏 관심있게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일행을 기다리는 지겨움은 나에게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흥미를, 아이에게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짜증을 안겨주었다. 그 때 쯤 외벽의 그림이 만화처럼, 스토리를 가진 10개의 그림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멋대로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내가 말한 내용을 꽤 재미있어 하며 한 번 더 들려달라고 했고 나는 어깨위에 아이를 올린 채로 법당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는데 아이가 재미있어해서 덩달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어 즐거웠다. 집에와서 찾아보니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인데 말 그대로 (진리를 상징하는) 소를 찾아다니는 스토리였다. 아이에게 즉흥적으로 해주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즉흥이라서, 금방 내용을 까먹고 만다.
일. 심우尋牛: 소년은 밧줄을 하나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모른다. 어쨌든 소를 찾으러 나오긴 했다. 아. 빗썸과 코인원, 업비트에 가입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탱화 아래에 쌓여있는 비닐봉지는 공양 후 남은 것들인듯..
사. 득우得牛: 드디어 소를 잡았다. 아직은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다. 내 것이지만 아직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붙잡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한다. 나름 저점이라고 15만원 짜리 이더리움을 한 개 사서 이걸 팔 수도 없고 더 살 수도 없고 코인의 등락에 마음 졸이던 때가 생각난다.
오, 육. 목우牧牛와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는 차츰 길들여져 야성을 잃고 순해졌다. 소 등에 앉아 승전나팔 대신 풀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15만원짜리 이더리움은 급등 급락을 반복했으나 옆에서 확신을 심어준 친구 덕에 여러번 돈을 밀어넣어 평단가는 20만원선에서 안정되었고 시세는 40만원을 돌파했다. 덕분에 폭등이든 폭락이든 마음 편히 앉아서 구경할 수 있게 되었...기는 커녕 너무 불안해서 다 팔아버렸다. 그리고 잡코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내 손을 떠난 이더리움은 100만원을 돌파하고 130만원까지 올랐다.
칠. 망우존인忘牛存人: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사람의 모습만 남았다. 17년 12월과 다음해 1월 사이, 법무부장관이 코인 거래소를 폐쇄하고 투자 자체를 금지시키겠다는 발표를 한 직후에 코인가격 급락으로 충격을 받고 넋나간 육신만 멀뚱히 모니터를 바라보던 내 모습과 흡사하다.
팔.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도 없고 사람도 없다. 한창 코인이 잘 나갈 때 유행하던 단어, '존버'를 하락기에 실천하다가 가치가 점점 내려가는 바람에 코인도 없고 돈도 없고 심지어 나 자신도 없는듯 경지에 이르렀다.
구. 반본환원返本還源: 원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일원상一圓相은 본디 궁극의 진리를 뜻한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자꾸만 0원을 상징하는 표시처럼 보이기만 한다. 며칠 전 비트렉스에서 언브레이커블이 상장폐지 되면서 자연스럽게 업비트에서도 "평가금액 0원, 평단 0원, 손익 0원"으로 변해버렸다. 실제로는 현금 200만원 정도를 주고 샀던 것 같다.
십. 입전수수入廛垂手: 전廛은 가게, 집터, 밭 등 속세의 공간을 가리킨다. 그림의 주인공은 진리를 깨우쳐 다시 속세로 돌아간다. 나는 증발해버린 잔고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억지로 떨쳐내며 출퇴근길에 오른다.
번외로, 다른 쪽 한 켠에는 '진리'를 상징하는 흰 코끼리를 차지하기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벽화가 그려져있다. 왠지 내 눈에는 남은 잡코인이 그래도 좀 올라서 본전이라도 찾느냐, 더 떨어져서 쪽박을 차느냐...처럼 보인다.
심우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링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