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나는 너무 슬프지만 흐흐흐 흐헤헤헤헿 아내를 위해 잘 다녀오라고 다소 울먹거리며 흐헿헤헤헿 헤헤헿헿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갖는 혼자만의 시간이라 머릿속엔 흐헤헤헤 슬픔과 긴 시간에 대한 기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목록들이 날아다녔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엄지발가락으로 낡아빠진 컴퓨터를 켜서 시덥잖은 웹서핑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정이다. 정말 아무것도 못했다. 아이가 먹다가 버려놓은 감자튀김을 곁들여 사리곰탕면에 밥 한 그릇 말아먹은 게 전부다. 갑자기 슬퍼졌다. 혼자 정말 잘 살았는데, 어느새 혼자서는 뭘 해야할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이(2박3일 같으면 비행기를 탔을 것 같다. 다음에는 아내를 위해 친정에서 2박3일정도 푹 쉬고 오라고 권해봐야겠다) 서글펐다. 영화의 한 장면, '브룩스 여기 있었다'가 떠오를 정도로.
너무 오래 화면을 바라본 탓에 시큰해진 눈을 책꽂이로 향한다.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오랜만에 '함수, 극한, 수열' 따위의 내용이 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매번 '집합'만 폈다가 덮어서 그런지 앞부분을 새까만 색을, 뒷부분은 새것과 다름없는 색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과 맞물려 잡생각에 빠졌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장과정의 특정 작용에 의하여 고유의 알고리즘을 형성하는 것 같다. 사람의 행동이나 태도,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 경향들은 놀랍도록 일관성이 있어서 항상 비슷한 선택을 한다. 대표적으로는 내가 코인 폭등 직전에 매도를 하고, 폭락 직전에 매수를 하는 그런 습관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사람들의 선택은 항상 비슷하지만 여러 환경적 변수가 있어 결과는 매번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알고리즘 실행값이 점점 쌓이게 되면, 달리 말해서 'lim f(x) = 어쩌고저쩌고'의 x값이 무한대에 가까워지면 하나의 수렴된 결과가 나오게 되지 않을까. 죽기 직전의 인생성찰 따위로 생각해도 되겠다.
회사에서 주구장창 욕 먹으면서도 절대 손해 안보고 남에게 민폐만 끼치는 동료가 있다. 본인이 유리할 때는 유도리니 효율성이니 융통성을 운운하면서 관례대로 하려하다가 본인이 불리한 경우에는 규정 운운하며 관례의 불합리를 외친다. 종종 정의로운 반대를 외치는데 말 내용은 정의롭지만 그 정의가 자기에게 유리할 때만 주장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누가 들어도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 대안이라고는 내 놓은적이 없다.
바보처럼 스스로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남의 일을 홀랑 덮어쓰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는 동료도 있다. 너무 일을 잘 해내기 때문에 주변에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감사인사도 변변히 듣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불만이 없을 수 있나. 수시로 나를 찾아와 궁시렁거리며 수다를 떤다. 그게 전부다. 길면 60분, 짧으면 10여분의 수다가 끝나면 다시 자리로 돌아가 미친듯이 일을 한다. 내가 봤을 때 절반은 남의 일이다. 대체로 애매한 일들은 본인이 처리하는게 더 속 편하다고 느끼는 탓이다.
위의 둘은 서로 다른 계산식을 갖고 세상을 살고 있는듯하다. 알고리즘의 반복실행이 지금은 음수와 양수, 유리수와 무리수를 전전하며 일관성 없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 한 지점으로 수렴될 것이다. 그게 빨리 오기를 원한다. 어제, 2번의 동료가 1번 동료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는지 울면서 날 찾아왔길래 해보는 생각이다.
나는 커피맛을 잘 모른다. 탄맛, 신맛, 과일향 정도를 구분할 수는 있지만 뭘 먹어도 '좋다, 나쁘다'는 느끼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저렴한 혓바닥을 갖고있다. 지난달 말에 신용카드 혜택으로 스타벅스에서 3만원을 결제하면 2천원 가량을 할인해준대서 기프트카드를 하나 샀다. 사회초년생이 연말정산에서 세금환급을 좀 더 많이 받기 위해 더 많은돈을 써제끼듯이, 할인을 받기 위해 불필요한 지출을 한 것이다. 그날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기프트카드는 한 달째 지갑에 아무렇게나 꽂혀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눈물이나 불행에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른다. 그런 메뉴얼이 있다면 상갓집에 가서도 꺼내서 볼 인간형이다. 상대의 눈물앞에서 내 손가락을 펴야하나 접어야하나. 팔은 혼자 팔짱을 껴야하나 차렷자세로 있어야 하나. 눈은 상대를 쳐다봐야하나 약간 아래를 내려다봐야하나. 이런 세세한 것들이 날 흔들어놓는다. 빨리 불편함을 모면하고 싶어서 커피 기프트카드를 꺼내주었다. '퇴근길에 좀 일찍 나서서 2층 창가 자리에서 커피 하나 시켜놓고 멍때리면 좀 나아질거'라고 말하며. 아, 더 난처해졌다. 그 순간부터 더 서럽게 울기 시작한 것이다.
으, 제발 누가 내게 메뉴얼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