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옛날은 참 도둑질 하기 좋은 시대였습니다. 고작 사람 키만한 담장을 넘어 집안을 휘젓기만 하면,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집안 돈은 전부 도둑님 소유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대부분의 재산이 '현물'이었던 당시 도둑질을 위해 필요한건 오로지 '체력'과 '용기' 뿐이었습니다. '더 많은 장물'을 짊어질 수 있는 '체력'과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을 때 받을 각종 매질과 고문을 견딜 '용기'만 있다면 누구나 도둑이 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당시 도둑질은 '사람'과 밀접했습니다. 별 다른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던 만큼, 도둑질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집과 창고를 지키는 '사람'을 해치울 수 있다면, 도둑님 앞을 가로막는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허술한 금고 따위 시설은 망치질 한 번이면 깨부술 수 있었죠. 때문에 귀중품을 집 안 구석구석 마당 여기저기 파묻고 숨겨두는 일이 많았지만, 이 역시도 '사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집 주인 김씨를 붙잡아 손가락 몇 개 접었다 펴주면, 누렁이가 뼈다귀 파묻은 위치까지 술술 뱉어내는 '사람 냄새' 넘치는 도둑들의 시대였으니까요.
기술
'인정(?)이 가득'했던 도둑질은 시간이 지나며 사람냄새를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물론 여전히 돈은 사람에게서 훔치고 가장 큰 위험도 사람이지만, 사람보다는 '기술'이 더 큰 장애물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금고와 은행의 발달은 도둑님들에게는 큰 시련이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몽둥이 한 자루 들고가서 온 집안 돈을 휩쓸어 올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게 된거죠.
더이상 집주인 김씨 멱살을 그러잡고 '돈은 어디다 숨겼냐!' 다그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도둑님도 짐작하듯 큰 돈은 전부 은행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은행에는 왠만해서는 열기 힘든 금고가 있습니다. 은행을 지키는 '사람'을 모조리 떄려 눕힌다 하더라고 금고를 열 수가 없으면 말짱 꽝입니다. 이제 돈은 금고를 열 수 있는 '기술' 있는 도둑이 필요합니다. 방망이질과 담력 외에도 '금고 따기 스킬'과 같은 '지식'이 필수가 된셈이죠.
도둑질에 필요한 '스킬'은 '보안기술' 발달에 보폭을 맞춰 점점 발전하다가 마침내 사기와 도둑질이 결합하고, 공학과 심리학이 결합된 '종합예술'로 발전하는 시기가 옵니다. 바로 '홈 뱅킹'이 발달하면서죠. 도둑님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무식하게 남의 집에 쳐들어가거나, 위험스럽게 은행과 목숨을 건 전면전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조건만 맞춰 은행에 '돈내놔~' 하면 은행이 고분고분 돈을 내놓는 세상. 다시 타켓은 '개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사람냄새가 넘치지는 않습니다. 전화로 인터넷으로 원하고 필요한 정보만 빼낼 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온정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또 다시 사람
인터넷과 모바일 뱅킹이 보편화되고, 극성인 도둑님들과 이를 핑계로한 모종의 계약 덕분에 통장 한 장 만들기, 돈 만원 보내기가 번거로워진 요즘, 여러 업체들은 새로운 보안 기술로 '생체인증(FIDO)'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중심에 있던 시대 말기에, 도둑님들이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으면서도 사람냄새는 쏙 빠졌던 이유는 도둑님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사람 바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행마다 한 장씩 있는 보안카드 숫자, 스팀 오너키를 달달 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람 자체'가 곧 정보가 되는 FIDO 시대에는 과거 어느때 보다 더욱 '사람냄새 가득한' 도둑질 시대가 열리게 될까요? 정맥, 홍채, 안면 윤곽 등등 '개인 고유'의 정보를 이용한 간편하고도 확실한 보안기술의 도입은 도둑님들에게 '어떤 스킬'을 요구할까요?
물론 기존과 같은 '피싱'에서는 아무런 사람냄새도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알아서 홍채인식 정맥 인식을 다 하고 돈을 뽑아서 도둑님들께 가져다 바치는일에 도둑님이 할거라곤 말 몇 마디 뿐이니까요. 하지만 '정보'를 얻어 직접 돈을 가로채기 위해서는 '사람 자체'가 필요한 만큼, 납치를 비롯한 '신체 접촉'이 필요한 범죄가 늘어날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적당한 타겟 하나만 납치하면 큰 돈도 얻고 여러모로(?) 쓸모도 많으니까요.
생체인증이 더욱 보편화된다면, 미래에 도둑님들께 필요한 기술은 개인적으로 '생명공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처럼 개인의 머리카락 한 올, 각질 몇 개로 사람 하나를 통째로 복제해 내는 기술이 있다면, 도둑질을 위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그야말로 '사람냄새가 풀풀 진동'하는 '배운 도둑님'들의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인거죠. 물론 복제한 인간도 인간인지(...) 복제인간을 만드는데 돈이 더 드는건 아닌지 등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뭐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저렴해지니까 그리고 복제한 인간이 어디 기업 회장님이라면... 한 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한 마디로, 생체인증 도입이 앞으로의 금융 관련 범죄들을 '더 잔혹하게' 바꿔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사람 외부에' 놓인 정보가 도둑질의 중심이었던 시대와는 다르게, 도둑에게 마저 '사람 자체'가 범죄 대상이 되는 시대가 다시금 열리게 될지도 모른다는거죠. '재화를 가진 사람' 을 넘어 '사람이 곧 방호벽'이 된다면, 도둑님들은 방호벽을 깨부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실겁니다. 지금까지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생체인증 도입이 나쁘다고 생각하는거냐구요!? 뭐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편하고 빠르고 얼마나 좋아요?! 다만 생체인증 도입이 사람들을 더 자극적인 범죄 대상으로 빠뜨리게 된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이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