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영화 얘기 입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고 왔습니다.
스필버그가 작정을 하고 만들었더군요. SF와 어드벤처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필모그라피가 한 장르에 사로잡히길 원하지 않았죠.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그렇게 가두는 외부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지만... 칼라퍼플과 태양의 제국을 시작으로, 결국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소위 드라마 장르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손에 쥐게 됩니다. 물론 이런 행보에도 스필버그의 SF 영화 감각은 전혀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와 비슷한 시기의 쥬라기 공원이 초대박이 납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스필버그의 영화는 거의 다 보았습니다. 감독한 영화 뿐만 아니라, 그가 제작한 영화를 포함하면 40개가 넘는 영화 중에 초창기 희귀작과 미개봉작, 최근 개봉작 몇 개를 제외하고는 다 보았지요. 개인적으로 스필버그의 영화는 2가지 계보를 가진다고 봐요.
- ET의 계보 ( 어린이날 전용 SF / 어드벤처 영화 )
- 쉰들러 리스트의 계보 ( 양껏 진지해진 어른을 위한 영화 )
저는 스필버그의 몸에 두가지 버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기 전에 꼭 버튼을 눌러 모드를 변경시키는 것이지요. 두가지 계통의 영화를 비교해보면,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다른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어 왔는지 놀랍습니다. 사실 장르를 넘나드는 감독들은 둘 중 한가지 경우입니다. 스필버그, 이안, 크리스토퍼 놀란과 같은 자타공인 대감독이거나, 아니면 아예 이도 저도 분명히 해내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친애하는 코엔 형제나, 기예르모 델 토로와 같은 훌륭한 감독들에게도 "대감독"의 호칭을 부여하기 망설여지는 이유입니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기에는 한 가지에 매우 특화되어 있는 감독들입니다. 아직까지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ET 계열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다시 말해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만들 때, 이미 진중함은 내다버렸으므로, 정색하고 영화를 요목조목 따지는 짓은 자신이 진지충이 된 듯한 자괴감을 선사할겁니다.
사실, 스필버그가 최근 선보였던 ET 계통의 몇몇 가족 SF 영화들이 상당히 실망스러웠죠. 그래서 한물 간거 아닌가.... 세월에는 장사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고 나자 문득, "그러고 보면 내가 너무 커버린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구니스, 8번가의 기적, 백 투더 퓨쳐, 인디아나 존스, 맨 인 블랙을 보면서 꿈을 꾸고 상상력을 키웠는데, 나는 이제 후크의 로빈 윌리엄스처럼 사회 생활에 찌든 어른 피터팬이 되버렸습니다. 레이 플레이어 원을 재밌게 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스필버그는 아직도 자신의 영화를 보며 설레고, 신나서 환호성을 지를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커버렸지만 SF 영화를 대하는 거장의 마음은 40년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는 가상세계 오아시스를 창시한 할리데이를 80년대 문화에 심취한 인물로 설정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소설은 주로 80년대의 게임과 영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로 제작될 때는 판권 문제와 현재의 대중을 고려하여 최신 캐릭터를 카메오로 제법 투입시켰습니다.
이 영화의 구성은 하나의 거대한 게임의 법칙 아래 존재하기 때문에, 그 퀄리티가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를 떠나, 구조적 완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효과적인 반전도 장착하고 있지요. 비쥬얼은 압도적입니다. 무엇보다 쉴새없이 등장하는 생동하는 피규어(?)들이 덕후들을 환장하게 만들 것에 틀림없습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현 시대의 대중을 향하고 있지만, 이러한 공상의 세계가 일련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무대인 가상세계 오아시스는 다름 아닌 80년대 히어로들의 오마주인 것입니다. 이들이 벌리는 한바탕 잔치를 보고 있으니 어느덧 고딩으로, 중딩으로, 초딩으로 회귀하는 것이지요. 아직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언 자이언트 보다는 라퓨타의 로봇병사가 어땠을까, 건담 보다는 에반게리온 일 수는 없었을까... 그래요. 한번 덕후는 영원한 덕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