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RED BALLOON VIRU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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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ing (zzing@zzing)



[ #1 ] 붉은 돌무덤의 환상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 괴테


  '붉은 돌무덤의 환상'은 고등학교 1학년, 재희를 떠나보낸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여름, 우리는 손을 맞잡고 차갑고 축축한 교보재 창고에 나란히 누웠다. 재희가 몸을 누일 매트리스를 펼칠 때, 창문의 햇살 프리즘은 요란떠는 먼지 알갱이를 잡아내고 있었다.

  "안녕. 물고기가 되어서 만나자."

  사람들은 쉽게 '그날의 일'이나 '그 사건'이라 명명했고, 나는 여전히 타자화된 호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쉽사리 그날의 일이나 사건 따위로 부르며 재희의 죽음을 건조하고 딱딱하게 사물화시켰다. 재희는 죽음의 강에 살며시 발을 담그었을 뿐, 내 친구를 밀어부쳐 강 건너에 이르는게 한건 세상의 언어가 아닐까. 재희는 죽은 후에야 비로소 사형선고를 받은거야. 그저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잖아...

  그 날 이후 나는 항상 멍했고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 사람을 알아보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같은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재희는 살아서 내 곁에 있을 때 보다 더욱 선명해졌다. 함께 했던 기억은 상상력과 버무려지며 새로운 기억들을 재창조했다. 재희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컵라면이 눈에 띄면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라면을 먹고있는 재희가 보였다. 재희와 나는 등교길이 같지 않았지만, 재희가 떠난 이후 학교에 갈 때면 어느 정거장에서 버스에 오르는 재희를 만났다. 정거장은 매일 바뀌었다.

  "재희는 버스에 오르면 항상 나를 먼저 찾아요."

  나는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자연스럽고 가역적인 순환이라 여겼지만 상담가의 생각은 달랐다. "무당에게 갔으면 귀신 붙었으니 굿하자고 할 상황이야. 그래서 괜찮아질거라면 복채라도 주고 싶다만."
상담가는 머리숱이 많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턱수염이 덥수룩했지만 깔끔한 인상. 한번씩 나를 지그시 바라볼 때 따듯함과 날카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상담가답지 않게 시시껄렁한 얘기를 자주했고, 상담 시간의 절반은 음악과 책 이야기를 했다.
  "씨앗은 결국 땅을 뚫고 나오지. 자연스러움엔 방향이 있단다." 이 날은 에드 쉬런의 Perfect.를 함께 들었다.
  "나무는 다만 태양에 가까이 가고 싶을 뿐이예요." 나는 무릎 위에 올려진 에르네스트 르낭의 책 모서리를 양손으로 꼭 쥐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호수가 있었다면 완벽했을 풍경이다.
  "그것 역시 일종의 방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논리적 반문이지만 나를 정복하려는 의도가 없는 따듯한 목소리다. 내 눈은 여전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고, 곧 작은 호수가 나타난다. 저기 찰랑찰랑 물위를 걷고 있는.
  "재희는 제 태양이었어요."

  환상이 보이기 시작한 건 주변 사람들이 지쳐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처음에 나는 환상인지 꿈인지를 한참 생각했다. 항상 잠에 빠져드는 의식의 경계에서 선명히 시작되었지만, 그 끝은 다음날 새벽잠을 깨며 꿈처럼 아스라졌다.

  환상은 선명한 한 점으로 시작되었다. 점은 빛의 알갱이였고 이는 아인슈타인의 유산이었다. 빛은 스스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동하는 한 점이었다. 요동하는 점은 또다른 점을 낳았고, 그 점은 또다른 점을 낳았다. 점과 점은 촘촘히 중첩되며 선이 되었고, 선은 또다른 선을 잉태하며 서로에게 닿았다. 선과 선은 연속적인 궤적을 형성하며 빛의 도형을 탄생시켰다. 도형은 멈추지 않고 끝없이 형태를 바꾸었다. 삼각형에서 사각형으로, 사각형에서 오각형으로, 선은 스스로 분쇄되며 무한의 다각형으로 향했다. 더이상 각이 나누어 질 수 없을 때 완전한 원이되었고, 원은 다시 한 점으로 돌아가 빛의 알갱이로 요동했다. 환상 속에 나는 무(無)공간에 갇혀있었고 저멀리 시간이 괴멸되는 희미한 잔상을 보았다. 어떠한 형태도 허락되지 않는 무한각형의 끝없는 시작과 회귀는 사멸된 시공간을 쪼개며 내가 기거할 틈새 공간을 형성했다.

  나는 무한각형의 순환을 보며 잠에 빠져 들었고, 환상은 꿈으로 이어졌다. 無공간의 틈새는 차갑고 축축했다. 빛 알갱이는 점에서 선으로 도형으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공간을 벌렸고, 공간은 검은색으로 채워지며 점차 내 몸을 부유시켰다. 순환은 점점 가속되며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켰다.

  나는 꿈속에서 숫자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나는 그 숫자를 이용해 순환을 셈했다. 나는 한 점이 무한각형의 원이 되는 순간을 한 주기로 명명하며 1 을 세고, 손가락 끝으로 무한의 검은 공간에 새로운 도형을 창조했다. 오각의 오면은 삼각의 일면과 각각 맞닿았다.
  "너의 이름은 별."
원은 다시 점이 되고, 첫 주기의 형태 변화를 반복했다. 다음 주기에 나는 2 라고 센 뒤에 무한의 검은 공간에 별 하나를 더 띄었다. 뒤이어 3, 그리고 4,5,6.... 주기는 요동하며 무한 공간의 끝까지 진동했다. 나는 그렇게 이리저리 누비며, 내 마음 가는 곳에 마구 별 그려댔고 결국 가장 완전한 숫자에 다다랐다. 내 몸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떠올랐고, 끝없이 펼쳐진 별들은 휘어진 공간의 곡률 위로 미끌어지며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내 몸이 다시 한단계 높은 차원에 이르렀고, 서로 밀고 당기는 작은 움직임들은 사실 거대한 하나의 소용돌이로 향하며 휘감기고 있었다. 별의 군집은 소용돌이의 핵으로 모여들며 장엄한 빛을 발광했고, 길잃은 별들이 느리고 고요히 한방향으로 흐르며 비로소 우주가 탄생되었다.

  환상으로 시작되는 한 점은 매번 우주가 탄생하는 꿈으로 끝났다. 새벽에 잠을 깨면 갓태어난 듯 생경하다. 나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 눈을 꿈뻑거린다. 그렇게 누워 꿈인지 현실인지를 한참 생각해야 했다. 여전히 의식 절반이 꿈속을 헤매고 있고, 결국 꿈에서 창조했다던 숫자도 별도 이미 이 세상의 것임을 깨달을 즈음에 깊고 진득한 고독이 밀려온다. 지구 따위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고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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