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 생존의 충분조건

cowboybebo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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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자신을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영화 <메멘토>를 시작으로 17년 동안 8편의 대작을 직접 각본, 연출해 선보였다. 그의 놀라운 점은 단 한번도 관객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는  점이다. 놀랄만한 일이다. 대게 한번쯤은 과거 영광의 무게에 휘청거릴 법한데, 그의 행보는 단단하고 더욱 견고하다. 2000년, <메멘토>로 시작되었던 젊은 감독의 전무후무한 상상력은 2010년, <인셉션>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인셉션> 이후에 이보다 더한 SF 영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며 염려했다. 하지만 염려는 기우였다. 2014년, <인터스텔라>가 개봉한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내가 보았던 가장 완벽한 SF영화였고, 나는 그 영화적 완성도에 취해서 여기가 분명 종착역이리라 확신했다. 어느 감독이 자신의 인생에서 <인터스텔라>같은 대작을 2번 만들 수 있겠는가? <인터스텔라>는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있어,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놀란 감독에게는 이미 <다크나이트> 시리즈가 있는데... 피터 잭슨은 아쉽겠다. <킹콩>은 <인터스텔라>에 비할 바가 못되니 말이다.)

그 후 시청을 미뤄왔던 최신작 <덩케르트>를 보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한계를 나같은 잔챙이가 이러쿵 저러쿵 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덩케르트>로 귀결되는 현재까지  필모그라피는 놀라움에 더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더 이어갈 수 있을지...

<덩케르트>는 2차 세계대전의 한 장면으로, 약 5년간의 전쟁 초입부에 있었던 "다이나모 작전"을 모티브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일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보통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으로 본다. 이때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상태였고, 폴란드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뮌헨 협정을 파기함으로써, 결국 영국과 프랑스 연합의 선전포고로 이어지며 세계 대전으로 발전했다.

실제 "다이나모 작전"은 1940년 5월 28일에서 6월 4일까지, 약 1주일간 수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일로 부터 1년여 공백이 있어 보이지만, 정작 독일이 본격적으로 서쪽의 프랑스, 네델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한 것은 1940년 5월 10일의 일로, "다이나모 작전"에 겨우 18일 앞선다.

1940년 5월 10일 새벽, 독일의 강력한 공세에 유럽은 영토를 지켜내지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믿었던 프랑스 마저 독일의 공군기와 전차부대 앞에 무기력했다. 프랑스군의 방어 전술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독일 공습 불과 5일만에 프랑스의 레이노 수상은 자력으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영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어떤 사전 훈련도 없이 갑작스럽게 집결된 연합군은 오합지졸이었다. 군사 자원도 부족했고, 최후의 전술을 수행할 조직력도 부족했다. 베이강 장군의 최후의 반격이 실패하자, 독일의 대규모 공군기와 정예 공습부대, 전차부대의 파죽지세에 연합군은 3주도 견디지 못하고 덩케르크 항구로 밀려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고, 선전포고 이후 1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초기 방어 실패는 매우 충격적인 결과였다. 독일의 만행에 분개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열혈 청년들은 실전 경험으로 무장된 조직적이고 기계화된 독일 군대를 감당하지 못했다. 덩케르크 항구에는 약 40만명의 젊은 병사들이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로 영국인이었고, 그 중에 12만명은 프랑스인이었다. 영화는 호기롭던 청년들이 패잔병이되어 타국의 해변에 발을 적신 채 도열하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고향으로 데려다 줄 함선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고국은 도버 해협을 지나 불과 75km 거리에 있었고, 희미한 고향땅의 윤곽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전장의 병력은 구출보단 공격과 방어에 더 시급했기에,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결국, 영국은 덩케르크의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민간인 어선과 보트를 동원하게 되었으며 이를 "다이나모 작전"으로 명명했다.

영화 <덩케르크>는 "살려고 하는 자"와 "살리고자 하는 자"의 이야기다. 죽음과 생존, 구원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며, 전장에서 패잔병으로서 생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묻고 있다. 영화의 연출은 육지와 바다, 하늘로 공간을 분류하였으나, 모든 공간에는 죽음과 생존, 구원이 존재한다.

육지는 죽음의 허상이 산재하고 생존이 발악하는 공간이다. 

히틀러의 오판으로 독일 군단은 덩케르크로의 진격을 보류하고 있었으나, 시한부나 다름없다. 바다와 맡닿은 해변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산재했다. 이제 퇴로는 없다는 것이 용맹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작동했다. 개별적 죽음에는 기약이 없고, 몰살은 눈앞에 있다. 구원의 방주는 뜸하고 내 자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개별적 존재는 생명과 죽음 경계에서 해변의 파도처럼 들이고 버려지기를 반복한다. 이는 희망과 절망의 주기와 같아서 개별적 병사는 동일한 존엄의 무게로 진동했다. 이러한 40만개의 파동이 중첩되고 공명했다. 생존을 향한 처절한 갈구. 생명은 오직 죽음 앞에 또렷하다.

하늘은 죽음을 종용하는 운명의 공간이며, 구원을 꿈꾸는 기도의 공간이다. 

아군이 없는 하늘에는 독일 폭격기가 때마다 폭탄을 선물한다. 히틀러의 군대는 진격을 보류하였으나, 적기는 먹이감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덩케르크 상공을 배회했다. 부족한 병력에도 영국군 비행기 3기가 투입되었다. 영화 막바지,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 글라이딩 비행으로 독일군의 비행기를 잡아내는 장면은 가히 종교적이었다.

바다는 죽음 농도가 희석되는 구원의 공간이다. 

독일 폭격기에 의한 죽음, 사고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 이러한 모든 죽음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살려고 하는 자들의 손과 구하려는 자들의 손이 직접적으로 맞닿는 공간이다. 구원이 성취되는 공간. 덩케르크 해안에서 노심초사하던 33만 8천명의 병사들은, 구하려는 자들의 손에 이끌려 바다로 나아갔다.

세가지 공간은 각기 다른 시간역을 가지고 있고, 소요된 시간도 다르다. 하지만 동일하게 영화 1시간 20분을 채우도록 편집되고, 빗겨있던 시간대는 서로 다른 앵글에서 오버랩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특유의 세련된 연출기법이라고 생각했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모두 시간의 소재를 탁월하게 다룬 영화들인데, <덩케르크>는 시간 자체를 소재로 활용한 것은 아니지만, 세련된 연출기법으로 활용되었다. 이쯤되면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시간의 마술사"란 닉네임을 붙여줘도 되지 않을까.

시공간을 초월한 죽음과 생존, 그리고 구원은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매우 친숙한 주제다. 그는 항상 창의적인 소재를 골라, 스펙타클한 대작을 만들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맥을 잊지 않는다. 그 맥은 "인간의 마음"이다. <인셉션>을 지배했던 강렬한 '욕망', <인테스텔라>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사랑'.

( <인터스텔라>에서 "사랑의 감정"이 논리성과 합리성을 초월한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대사를 기억하시나요?  오우~ 살아서 영화를 보는 즐거움.  )

일류 감독에게 인간의 마음은 벗어날 수 없는 족쇄지만, 삼류에겐 그저 서사의 도구일 뿐이다. 크리스포터 놀란의 서사는  장대하나 그 속에 세밀한 인문학적 통찰을 품고있다. 그는 독수리의 눈으로 숲을 바라보다가,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를 운반하는 일개미같다. 크리스토퍼 놀란 특유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연출은 이야기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강한 축과 광대한 스펙트럼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덩케르크>를 관통하는 '인간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 맥은 '연민'이다. 

개별적 상관관계를 떠나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애틋함. 굳이 설득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이 사람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관용. 영화 <덩케르크>는 죽음을 목도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들의 당위성을 긍정한다. 또한 애뜻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자들의 관용을 지지한다. 나아가 그들의 공존은 항상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대상이 프랑스인이라도, 겁쟁이나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패잔병이라 할지라도 죽어가던 자의 구원은, 잘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