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얘기 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포스팅 추천곡은 박정현의 "미아" 입니다. 꼭 들어보세요. ^^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대 눈동자에 건배를 읽었습니다. 9개의 단편 소설이 있는 소설집입니다. 저같이 단편 소설 매니아에게,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소설집이 출간된다는 것은 미세먼지가 없는 청명한 하늘처럼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 소설집의 9개 이야기를 두고 하루에 하나씩 읽겠다고 생각했다면 그 계획은 실패할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 단숨에 서너개를 읽어버리거나, 아니면 한 자리에서 9개 소설을 다 읽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이고가 다루는 이야기의 범주는 점점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들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첫번째 이야기인 "새해 첫날의 결심"을 가장 재밌게 읽었고, 세번째인 "오늘 밤은 나 홀로 히나마쓰리"는 단편으로서 훌륭한 구성력을 가진 소설입니다. 이 책의 제목인 "그대 눈동자의 건배"는 네번째에 수록되어 있는데,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목이 감각적이라서 마케팅과 표지 디자인을 고려한 선택이라고 추측합니다.
작년 인가요? 김영하 작가는 어느 팟캐스트에서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 얘기 하던 중, 출판계에서는 단편 소설을 출간하는 작가를 장편 소설을 쓰는 작가들 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더군요. 김영하 작가가 단편 소설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의 개별 작품을 완성한다는 측면에서 긴 이야기는 짧은 이야기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교 관계에 위치시키는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간혹 장편 소설을 짧게 쓰면 단편 소설이 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 말은 제게 시를 길게 쓰면 수필이나 단편소설이 된다는 것과 같은 소리처럼 들립니다. 이 말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장편소설로 쓸 수 있다는 소리와 같습니다. ( 대성당은 가장 위대한 현대 단편소설입니다. 제 생각에...) 핫바리 독서가들은 시와 수필, 단편소설, 중편소설, 그리고 장편소설이 우리의 감정과 사고를 건드리는 범위와 방식, 그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기호가 고착되면 편견이 되고, 그 편견은 자신을 가두는 족쇄가 되지요. 편견은 이 세상이 이토록 재미난 것이었는지 모른채 살아가게 만듭니다.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제 의식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굳이 나누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빛나며 완전하기에 각자의 존재가치를 가집니다.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소설은 장편이 아니냐고 떠벌리는 인간들에게 저는 여지없이 물어봅니다. 니가 아래의 5가지 중에 3개 이상을 읽었다면 니 말을 인정하겠다. 백의백이면 헛웃음을 날립니다. 혹시 아래 소설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 그냥 단편이나 장편이니 같은 소리는 마음 속에 담아두시는게 좋습니다. 참고로 저는 2개는 읽었어요. ^^ 나머지는 평생의 버킷리스트지요.
마르셸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박경리 "토지"
이문열 "삼국지"
김용 "영웅문"
게이고의 소설을 읽는다고 말하면, 소설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일본 소설이라면 나쓰메 소세끼나 오에 겐자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을 들먹이다가 아무리 안되도 하루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냐는 허풍섞인 핀잔을 늘어놓습니다. 물론 요즘엔 이런 인간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게이고의 소설이 해적판같은 표지로 돌아다니던 시절에는 그랬습니다. 한창 아사다 지로의 책을 읽을 때도 그런 소리를 제법 들었지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같은 명작은 순수소설만이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편식충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는 소세끼나 겐자부로, 야스나리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이, 너는 하루키를 왜 읽는지 묻습니다. 하루키는 자기가 왜 소설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소설을 쓸 때도 어떤한 목적도 담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소설이 시작될 때 이 소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고 얘기합니다. 심지어 독자가 왜 자기 소설을 읽어야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굳이 일본 소설이라면 적어도 하루키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군요.
소설은 왜 읽는걸까요? 수많은 고고학적 인문학적 접근이 있겠지만 별로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본질은 뭐니뭐니 해도 "재미"입니다. 이야기는 재미있어야 하고, 그게 자기표현되었든 정보의 저장이나 전달이 되었든, 훈육이나 여론의 목적이 되었던 간에 이야기는 재밌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기사나 매뉴얼, 논문 등의 다양한 글쓰기 포맷이 존재합니다. 재미가 없다면 굳이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야 할까요? 소설은 재밌자고 읽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독자는 무언가를 느끼게 되죠. 그건 독자의 몫입니다. 소설에 있어서 교훈이 없는 얘기보다 재미없는 얘기가 더 악한 것입니다.
재미의 범주는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누군가는 하루키와 피츠제럴드를, 누군가는 헤세를, 누군가는 김연수와 김승옥을, 누군가는 움베르트 에코를, 누군가는 보후밀 흐라발을, 누군가는 카프카를, 누군가는 스티븐 킹을, 누군가는 게이고를, 누군가는 필립로스와 폴 오스터를...혹은 마르케스의 고독의 세계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재미의 세계. 이야기의 세계는 무궁무진 하기에 소설은 당신의 재미를 찾아떠나는 항해와 같습니다. 그 어떤 소설도 당신에게 지겨운 것이라면, 단언컨데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소설과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권유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합주와 같은 소설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재즈와 같기에 좀 편안하겠지만, 왜 이런 소설을 읽고있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겁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편하게 듣는 대중 가요와 같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접하고 싶어하는 분들께는 항상 스티븐 킹이나 게이고를 권하고 있습니다. 성공율이 높아요. 실망스런 피드백은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소설은 그냥 재밌어서 읽는 겁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왜 소설을 읽는가?" 가 궁금하신가요? 그럼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왜 인생을 사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다면 인생의 어떤 문제도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잖아요? 왜 사는지도 모르는데, 소설이 뭔 상관이예요. 재밌으면 읽고, 아니면 마는거죠. 스팀잇과 같은 거예요. 재밌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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