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 정의란 무엇인가?

cowboybebop(57)
Published in
#kr
Words
978
Reading
5 min
Listen
Play
9y

다운로드.png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입니다. (위 사진은 명탐정 아르퀼 푸아로)

이제 곧 스포일러가 시작됩니다. 영화를 볼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강력한 스포일러입니다.
혹여나 이 영화를 볼 계획을 가진 분들은 읽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자, 이제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영화의 이 장면에 삽입된 OST를 아래 링크하였습니다.
죄송하지만, 되도록 이 OST를 들으며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급행열차는 눈보라에 기진맥진한 밤공기를 가르며 런던으로 달리고 있었다. 열차에는 12개의 일등칸이 있었고, 일등칸의 출입문이 나열된 긴 복도의 끝에는 수석 승무원이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등칸의 승객들은 모두 15명으로 제각기 자신의 짐과 사연을 들고 플랫폼에 들어섰고 티켓을 끊고 열차에 올랐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늦은 밤, 열차는 달리고... 단 두사람,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그 옆방의 섀무엘 E. 랫체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13명의 승객은 자정을 넘어까지 각자의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잠들지 못한 채 심판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휘몰아치는 눈은 잦아들 줄을 모르고, 곧 닥쳐올 사건을 예고하듯 바람은 거칠게 차창을 흔들었다.

약속의 시간. 수석 승무원은 조용한 걸음으로 일등칸의 출입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신호를 전달한다. 단 두사람,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그 옆방의 새무엘 E. 랫체트를 제외한 채. 신호를 받은 11명의 승객들은 출정식을 하는 병사들처럼 민첩하게 자신의 방 앞에 도열한다. 이들은 치밀한 계획 아래 주저없이 움직였다. 11명의 승객과 1명의 승무원. 이렇게 12개의 그림자가 잠들어 있는 한 남자의 방에 신속하게 잠입한다. 그 방에는 섀무엘 E. 랫체트가 잠들어 있었다. 11명은 랫체트의 팔다리와 입을 짓눌렀다. 나머지 한 여인. 고상하고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랫체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인은 랫채트의 겁먹은 눈을 똑똑히 응시한다. 그리고 손에 들린 칼을 랫체트의 가슴에 내리 꽂았다. 조금의 자비도 망설임도 없었다. 칼은 곁에 서있던 다음 승객의 손에 넘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랫체트의 가슴에 꽂혔다. 랫체트의 입은 굳게 붙들려 조금의 비명도 세어나올 수 없었다. 짓누르는 무게에 팔다리도 꿈쩍할 수 없다. 다만, 자유로운 것은 랫체트의 눈과 귀였다. 랫체트의 눈동자는 분노어린 12개의 시선 사이를 방황했고, 그의 귀에는 특급열차의 요란한 기계마찰음과 차창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날카로운 금속이 자신의 살점을 궤어내는 소리만이 멤돌았다. 다시 칼은 다른 승객의 손에 쥐어졌고 랫체트의 몸 속에 수차례 드나들었다. 12명의 승객은 성찬식에 임한 사제들처럼 공평하게 칼을 나누어 가졌고, 랫체트의 살점을 가로질렀다. 그들의 성찬식이 끝났을 때 랫체트의 몸은 완전히 죽어있었고, 그의 영혼은 죽음의 강을 건너 심판의 세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장면이 좀 연상되시나요? 영화 장면을 다시 글로 표현해봤습니다. 물론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1934년 발표)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각색 있어요. 랫채트는 약을 먹은 상태여서 그의 의식 상태는 불확실합니다. ^^

그런데, 이 장면에 삽입된 OST의 제목이 무엇일까요? 바로, 정의(JUSTICE) 입니다. 아이러니 하죠? (아직도 안들었으면 한번 들어보세요. ㅎㅎ ) 12명이 하나의 칼로 단 한사람을 난도질하여 살인하는 이 끔찍한 장면에 "정의"라는 타이틀의 장엄한 음악이 흐르다니 말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 말미, 명탐정 푸아로가 지난한 추리 끝에 자신이 도달한 단하나의 진실을 공표하는 과정에서 등장합니다. 푸아로가 당면했던 함정은 14명의 용의자 중에 단 한명의 범인을 찾겠다는 시도 자체였죠. 용의자들 간에 정교하게 얽혀있는 알리바이가 푸아로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미 아셨겠지만, 스토리의 핵심 반전이자 푸아로가 도달한 진실은,

"용의자 모두가 범인이었다!!"

1934년 당시 이러한 추리소설을 썼던 애거사 크리스티는 정말 추리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명의 용의자는 외모나 직업, 사회적 지위 등 표면적으로 연관성을 떠올리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궤적은 단 한가지 사건에서 만납니다. "암스트롱 아동유괴 살인사건" 입니다. 사회적으로 덕망 높았던 암스트롱 대령의 아들이 유괴되고 살해당합니다. 그 충격으로 암스트롱 대령과 그 부인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납니다. 14명의 용의자는 암스트롱 집안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로, 이 사건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고 삶이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용의자들의 완벽한 알리바이로 추리의 벽에 부딪힌 푸아로는 이들이 공범이라면 말이된다...는 가설을 세우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용의자들의 연관성을 찾기시작하죠. (역시 명탐정 ^^)

그리고, 짐작하시겠지만 이 사건의 살해범이 바로 섀무엘 E. 랫체트 입니다. 랫체트는 진범임이 밝혀지지만 재산과 더러운 인맥을 사용해서 도주하게 되지요. 용의자 중에 허바드 부인은 사실 죽은 아이의 외할머니인 린다 아덴입니다. 저명한 연극배우였던 그녀는 딸과 사위, 손주를 생각하며 심판을 결심합니다. 앞서 소개드린 장면에서 랫체트의 가슴에 처음으로 칼을 꽂는 여성이죠. 특급열차 살인사건은 린다 아덴의 계획과 연기지도 아래 실행된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OST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실관계를 아셨죠. 어떠신지요? "정의"라는 제목의 OST 삽입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영화의 감독은 아르퀼 푸아로를 연기한 케네스 브래너 입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흑백으로 처리하고 끔찍하게 살육되는 희생자를 전혀 비추지 않고, 오직 분노어린 가해자들에 집중합니다. 감독은 희생자와 가해자란 지칭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 어쨌든 "정의"라는 제목을 OST를 삽입하죠. 말하지 않아도 감독은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독은 그렇다 치고, 명탐정 아르퀼 푸아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모두 범임인 것을 알리고 경찰에 넘길까요?

푸아로는 대단히 편집증적인 사람인데다 자뻑이 심한 캐릭터죠. 생면부지인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감추면서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푸아로는 이 사건을 덮기로 결정합니다. 직접 경찰에게 범인은 도주했다고 거짓말을 해주죠. 그리고 열차를 떠나면서 14명의 공범자들에게 과거의 상처로 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트의 시각은 분명히 이 장면을 "복수극"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 잘난 푸아로도 작가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푸아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비대칭을 견디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한 가정을 파괴시킨 살인자 랫체트가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 버젓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푸아로에게 있어 비대칭적인 사회의 모습이었을테죠.

영화 초반의 복선이 눈에 띕니다. 길을 걷던 푸아로는 오른발에 똥을 밟게 됩니다. 푸아로는 더러운 똥보다 비대칭성을 더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왼발로 똥을 밟아 대칭을 만듭니다. 자신의 발에 똥을 묻히더라도 균형은 맞추어야 하는 것. 푸아로는 신과 대등한 존재가 되어 그들의 "심판"을 허락합니다.

"모두를 속여도 둘만은 속일 수 없다. 신과 아르퀼 푸아로!!" ( 와, 진짜 자뻑은.... 절레절레... )

애거사 크리스티는 푸아로를 빌어 이들의 "심판"을 사람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이 책은 최대 다수가 최대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정의"라는 제러미 밴담의 공리주의나 "정의"란 자유의 문제라고 말하는 칸트와 존 롤스의 생각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는 애매모한 주장을 하고 있죠.

만약 마이클 샌델에게 "푸아로의 선택"에 대해 질문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진짜 한번 물어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2인의 살인은 심판입니까? 아니면 복수입니까? 푸아로의 선택은 올바르고 정의로운 선택일까요? 살인을 묘사하며 OST "JUSTICE"를 삽입한 케너스 브래너의 선택은요?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옳고 그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개인적으로 케너스 브래너의 연출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특별히 오늘 소개드린 씬은 어떻게 소설의 장면을 영화화할 것인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그리고 조니뎁은 진짜 작품을 가려서 출연하는 배우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허바드 부인을 연기한 미셸 파이퍼는 오히려 직접 부른 OST가 기억에 남는군요. 이 진혼곡을 듣고 나면 아마 "푸아로의 선택"이 맞았다는 것에 한 표를 던지실지도 모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 정의란 무엇인가?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