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일기를 펼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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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3년 4월 6일

희망퇴직을 받고있다. 분위기가 뒤숭숭. 지난 금요일 퇴직자들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이차장님. 김부장님. 황차장님. 신차장님.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안면이 있는 여러 얼굴들...

이차장님은 A사에 함께 간 적이 있다. 김부장님은 신입사원 시절 제품 판매량을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드린 적이 있다. 황차장님은 내가 입사할 당시 인사팀 교육 담당자였고, 신차장님은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뭔가 계약 건을 진행하기 위해 연락을 드렸었다. 이름모를 어느 팀장님은 국밥집 건너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신 후 우리 테이블 까지 계산해주셨다. 잘 알고 지내던 최차장님은 진작에 인사를 하고 연차를 냈다. 강차장님은 이날, 퇴직 인사 대신에 관리하던 대리점의 점장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없어도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남은 자들, 희망퇴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왜 희망퇴직을 하는지, 누가 희망퇴직을 신청했는지, 목표 인원이 몇명이고 부문 별로 얼마나 할당되었는지... 임원실에 불려간 인사들에게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희망퇴직이 끝나면 조직개편은 어떻게 될건지...

사람들의 표현방법은 제각각이었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담담한 입. 냉정한 입. 분노한 입. 자조하는 입... 떠도는 말들은 그 누구의 것도 객관적일 수 없었다. 미확인된 짜라시들이 돌아다녔지만 인사팀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꼼꼼히 따져보지도 못하고 개입할 수도 없는 먼 세계의 일이기에 결국 찾아드는 것은 일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자기자신을 향한 무기력함이다.

이 파도는 우리에게는 파도일 뿐, 전체에 있어 작은 일렁임에 불과했다.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떠드는 것일 뿐이다.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두렵다는 것도. 아무도 "나는 두렵다"라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퇴직 후에도 이들의 노동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남은 인생의 설계가 그리 어렵지 않은 이들도 있을 테지만, 자녀가 어리고 여전히 생계를 염려해야 하는 자들. 그들의 밤은 짙고, 숨을 죄는 듯 뒤척이다 보장받을 수 없는 내일을 생각하며 사나운 꿈에 시달릴 것이다.

퇴직 희망자 중에는 처음으로 자신이 몸담은 회사를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이 회사에 들어와서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고, 언젠가 이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큰 일을 해내겠다던 희미한 포부가 이제 자신의 자리를 정리해야 하는 이 시점에 어렴풋이 떠오르련지...

떠나는 이들은 웃고있었지만 그들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그 쓸쓸함이 그들의 것이지 내게 속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떠나는 자들의 쓸쓸함은 따스했고, 남은 자들의 위로는 차가웠다. 나는 손을 건낼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들의 눈동자에 새겨진 존엄을 들여다 봤다. 이 곳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들은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버지여야 할테지...이 곳을 떠나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와 그들의 존엄. 삶은 굴곡이 있고, 풍파는 몰아치다가도 그치기 마련. 인생의 한 막을 내리는 선배들의 존엄이 어디로 가든 빛을 바래지 않고 지켜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