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어느 봄날.. 그당시 산골 중학교에 다니던 촌놈이었던 나는, 집에서 차로 5분거리에 있는 할머님댁에서 머리가 아프시다던 어머니는 집에둔채, 아버지와 할머니 셋이서 저녁식사를 한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님께 인사도 하지 않은채 내방으로 훌렁 들어가 버렸었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맛있는 식사를 했지만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꽤 오래 담소를 나누셨던탓에 그나이때 남자 아이들이 의례그렇듯 어른들의 대화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거니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다만 어서 집에 가기만을 한참 기다리다가 지쳐있었던것 같았다.
내방문을 열자마자 씻지도 않은채 대충 잘준비만 마치고 침대에 털썩 누워서 무작정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이내 좀전까진 들리지 않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혼자 구시렁대면서 잘준비를 하고있는동안에도 계속 아버님께서 어머니를 반복해서 부르고 계셨었던것 같다. 서너번쯤은 그냥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부르는 횟수가 점점 반복되자, 직감적으로 무슨일이 생겼음을 느낀 나는 잠을 애써 떨쳐내며 떨리는 마음으로 부모님의 방문을 열었고..
그 이후로 나는 더이상 평범한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될수가 없었다.
그날의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다. 어머님은 분명 숨을 쉬고 계셨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고, 놀란 토끼눈을 뜨며 제대로된 반응도 하지 못한채 방문에 그대로 얼어있는 나를 발견한 아버지께서는 애써 괜찮으시다며 걱정말라는 말을 했음을 기억한다.
그리곤 병원에 가기 위해 어머님을 강제로 부축해 차에 옮겨 드렸으며.. 그 짧은시간...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어머님의 마지막 온전한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던 순간도 차 뒷좌석에 어머님을 태워드리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머님은 차에 타던순간 마치 그냥 가벼운 두통이 있는 사람인양 멀쩡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머리가 아프니 누울수있게 자리를좀 만들어 달라고 하셨고,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목소리를 더는 들을수가 없었다. 그날 입원이후로 만 하루를 채 채우지 못하신채 어머님은 그렇게 사이좋던 남편과 생때같은 자식 둘을 남겨둔채 그렇게 급하게 하늘로 가셨다.
아버님은 어머님과 유난히 사이가 좋으셨다. 친구같은 사이로 때로는 싸우기도했지만 워낙 두분다 유머감각이 넘치셨기때문에 내 유년시절 기억속의 부모님사이는 더할나위가 없이 좋았다. 젊은시절 농구선수를 하기도 했던 어머님은 타고난 체격이 큰 탓에 어딜가던지 항상 눈의 띄는 분이셨고, 늘 밝으셨으며, 남을 돕기를 좋아하셨다.
그래서인지 더 가족에게 남겨진 상처가 컸던것같다. 그 이후로 많은일이 있어 다 적지는 못하겠지만 내기억에 한동안 나는 마치 어머님이 원래 없었던 아이인양 덤덤하게 살았었다. 그당시엔 나도 내 아버지도 내 여동생도 이런 큰 상처를 이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사실 오늘은 어머님의 묘를 이장하는 날이다. 경황이 없었기때문에 묘의 자리가 잘못되었음을 깨닳은것은 이미 장례를 모두 마친뒤였다. 우리 가족에게는 가족묘지가 있는데, ( 안타깝게도(?) 내자리는 없다..) 무슨연유였는지 어머님의 자리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이걸 항상 안타깝게 여겼지만.. 잔인한 이 세상은 이 잘못을 바로잡을 여유를 우리집에 한동안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먹고살기 바쁘단 핑계로 십수년이 흘러서야 제대로된곳으로 옮겨드리기위한 파묘를 진행하기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많은 의견과 수많은 방법들이 있었다. 파묘라는 행위는 잘 알려진 방법이 아닌지라 정보가 많지 않았으니.. 시작부터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다행히 시골은 인맥이 거의 모든일을 해결해 준다... 어렸을적 아버님과도 안면이 있는분께서 전문가라고 하시니 부탁드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잘못된 묘자리에서 어머님을 꺼내 유해를 화장한뒤 표석을세워 좀더 좋은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래봐야 원래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듣자하니 우리가 묘를 잘못쓴데에는 위치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는데, 묘의 옆쪽에 비가오면 물이 흐르는 물골이 형성되어있다는 점이었다. 전문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80년이 넘은 묘도 물자리에 잘못쓰면 시신이 물에 둥둥떠서 하나도 썩지 않은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보았다고했다. 이런경우 시신 수습비용이 크게 증가하는것은 물론 시간도 엄청나게 지체되는등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아버님은 최근 어머님의 관에 물이 차있을까바 잠도 제대로 못주무실정도로 신경을 쓰신다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아버님의 경험도 한몫 했는데, 30년 가까이된 다른분의 이장을 젊은시절 도와드린 적이 있으셨는데, 그당시 완전히 썩지않고 시체물에 둥둥떠있는 시신의 처참한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인것같았다. 어머님의 마지막이 그런 처참한 모습이 될수도 있을것같다는 걱정이 아버님의 건강을 해칠정도로 심해져 있었다. 아버님은 평생 그점을 가슴의 짐으로 달고 살고 계셨었다.
파묘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당시 포크레인을 동원해 묘자리를 팠던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관이 다른사람들보다 상당히 깊게 매장되어있었다고한다. 그래서 전문 인부가 거의 사람키 정도를 파 내려 가서야 겨우 유해를 발견할수 있었다. 게다가 관이 완전 썩어버려서 유해의 위치를 특정하기 상당히 곤란하다는 점은 덤이었다.
천만다행인지 물이 잘 배수되는 땅인지라 물이 차있지는 않았으나 약간의 습기가 있어서 나무로 된 관이 완전히 썩어서 검은 색 정도로만 구분할수 있었기때문에, 날카로운 삽으로는 남은 유해를 훼손할수 있어서 전문인부가 손으로 두개골부터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게 수습하느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뼈만남았다고는 하나, 시신의 모습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기에 지켜보는 입장으로서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일단 유해가 수습된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시신은 아무데서나 화장을 할수없기에 전문 화장터로 보내져서 두시간만에 나무로된 단지에 모셔져 나왔고, 미리 정해놓은 자리에 60~70 센치정도만 파내려간뒤 그곳에 단지를 넣고 위에 표석을세워 표시하는 방식이다.
아침 8시반부터 시작한일을 오후 세시가 다 되어서야 모두 마칠수 있었다. 다 마치고나니.. 그간 걱정했던 부분들도 다 사라졌으며, 깔끔하게 정리된것이 보기에 좋았다.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고백하건데 서른중반의 나이가 다 되도록 어머님에게 이토록 무언가를 온전히 바친 날이 없었던것같다... 그리고 이날의 기록을 글로 남기는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서도 잠시간 고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렇게 글을 쓰고 되짚어보는 시간이 나 스스로에게도 그간 가슴한켠을 움켜쥐고 있던 무언가를 놓아주는듯한 느낌이 들게 하기에.. 후련하다는 기분이 들어 잘한것같다.
앞으로 몇번더 찾아가 표석이 잘 자리를 잡았는지 등을 확인해야하지만.. 오늘 이렇게 내 20년 묵은 감정을 스팀잇에 한번 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