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이분법은 참으로 명쾌하다. 악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선은 지켜낸다. 나쁜 놈과 착한 놈, 악의 무리와 정의의 사도간 대결이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악당들을 착하고 정의로운 전사들이 지켜낸다. 육박전 끝에 결국 선이 이긴다. 악당을 멋지게 쳐부수는 용사들은 아이들의 영웅이다. 아동용 만화에서 두드러진다. 아이들은 만화의 주인공을 보며 영웅들의 활약에 환호한다.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들은 괴물을 보낸다. 세상을 혼란에 빠트려 야금야금 갉아먹을 생각 같은데, 좀 이상하다. 잔뜩 한꺼번에 보내면 될 것을 매번 조무래기 달랑 한 놈만 보낸다. 나타나는 족족 주인공 일당에게 박살난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는 후일을 기약하며 퇴장한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하하하하 웃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사라진다.
주인공들은 승승장구하지만, 악당들은 항상 실패한다. 작은 계획도 성공하는 법이 없다. 매회 이어질수록 이들은 개박살 나고 망신 당한다. 보는 마음에 서서히 악당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긴다. 응원팀이 10-1로 이기고 있으면 슬슬 상대팀이 불쌍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도 모르게 응원팀이 바뀌어 악당들을 응원하고 있다.
악당들은 영웅보다 친근하고 매력 있었다. 포기할 줄 모르는 집념을 가진 이들이었고 패배했음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신사들이었다. 페어플레이 정신도 있었다. 난 이들의 포스에 반했다.
반면 주인공 무리는 어땠는가. 점점 변해갔다. 유연함과 임기응변 따윈 없어졌다. 이들의 싸움은 성전이 되었고, 자신들의 행동은 절대 옳은 것이 되었다. 그들이 틀렸을 수 있음에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이런 의문이 가능하다.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심판하는가? 적법한 공권력을 가졌는가? 하다못해 슈퍼히어로 자격증이라도 땄는가? 정의라는 허울을 쓴 일개 자경단원 아닌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선과 악은 달라진다. 기준과 관점의 차이일 수 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당하다 믿고 남을 비난하는 자들은 점점 괴물이 된다. 악당보다 악해진다. 도대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우리는 여론재판 혹은 인민재판으로 다른 이를 비난하며 심지어 심판한다. 무슨 자격이 있는지 모른다.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도 심증만으로 사람을 죽인다. 김보름과 노선영 중 잘못한 사람은? 정봉주는 성추행범인가?
살인 면허는 물론 판사 자격도 갖지 못한 우리다. 차고에 지구를 지킬 변신합체로봇도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론을 만들어낼 방구석 키보드가 있다. 싸늘한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다. 악인을 만들어 낙인 찍고 심판한다. 익명 뒤에 숨어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 돌을 던진다. 편안하게 나쁜 놈을 응징한다. 누구나 어릴 적 꿈꾸던 영웅이 되는 세상이다. 참으로 멋진 세상이다.
이미 괴물이 된 우리는 비난 당하는 그들보다 훨씬 악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