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칸 박사의 핵망령과 북한의 핵개발 비하인드 스토리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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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과 인도의 핵개발

국제 핵 암시장의 대부였던 파키스탄의A Q Khan과 인도 핵의 원조인 Abdul Kalam은 서로를 증오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만 공통점도 많다. 하긴 원자탄 제조 시험은 인도가 거의 20년 정도 파키스탄을 앞선다.

파키스탄 원자 폭탄의 대부이면서 북한 핵의 삼촌쯤 되는 칸 (Khan)과 인도 핵의 원조 압둘 칼람 (Abdul Kalam)은 현재 모두 인도에서 태어난 이슬람교도로서 현재 거의 치매상태가 가까운 영감들로서, 둘 다 해외에서 장기 체류하면서 노하우를 훔쳐왔음에도 불구하고 핵이란 국가의 국보급 과학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미친 놈들 정도로 보면 된다. 거의 IS 수준 아닌가 한다. 이 두 인간들은 핵 개발뿐만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 ICBM 개발에 대해서도 자국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자국에서 핵 시대의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 받는 이 두 미친 놈 들도 큰 차이가 있다. 칸은 문자 그대로 생긴 꼬락서니처럼 폭탄 같은 스타일임에 반해 압둘 칼람은 웃기게도 시인으로 유명하다네요. ㅎㅎ 원자탄 많이 많들고 기분이 나서 시를 읊었나 보죠????

이 두 종자 중에서 칸이 더 유명해질수록 다양한 색채를 띄고 괴상한 또라이 행각을 더 심하게 했다. 서방에서 볼 때에 칸은 말이 과학자지 거의 깡패 과학자 수준이며 동시에 스파이로 볼 수밖에 없는데 반대로 칸은 오히려 서구의 가치와 선교 사역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평생의 미션은 아이러니하게도 파키스탄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해 뻔한 핵보유 사실을 평생 우려먹는 일이었다.

칸은 2002 년 기자 회견에서 "나는 파키스탄에서 새와 개미를 키울 정도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한편 소문이 퍼지면서 그는 이슬라마바드의 "Hotshots" 나이트 클럽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그의 한 달 수입은 불과 400달러에 불과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20년 동안 기록되고 보고된 그의 언행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2002년 발언도 아주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국의 무장된 국방력은 더 이상 압박감을 느끼지 않으며 적(인도)과 동등한 위치에 섰다고 믿는다. 아울러 마찬가지 기조로 언론의 압박 우려를 불러 일으키는 파키스탄의 수십억 달러 규모의 원폭 성공에 따라 "이제는 우리의 교육과 경제 및 사회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게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일 것이다. 핵이 완성되었으므로 강성대국 건설은 성공리에 끝났고 이제는 경제대국으로 가야 한다는 김정은의 주장이네요.
현재 국민 1인당 소득을 보면 그 많은 인구수를 가진 인도가 140위권으로 1500달러 수준인데 파키스탄은 160위권으로 1200달러 수준이며 같은 160위권의 북한이 1000달러 수준을 참고해 보면 웃기는 소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광신도적인 무슬림의 애국심

칸 박사는 비록 금속학자로 훈련되었다지만 그의 박사학위 취득과정에서 파키스탄에 원자탄을 안겨줄 수 있도록 그 이상의 것 즉 원자물리학, 엔지니어링 및 경영에 이르기 까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취득했다. 아울러 그는 네델란드에 장기간 체류했는데 네델란드의 비호(?)하에 우라늄 연료를 거의 원자탄 수준 등급에 이를 정도까지의 제조 공정 비밀을 훔쳤다. 그는 무슬림 광신도 또는 지하스트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애국심이라는 학위도 취득했다. 거의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수준의 자아도취 내지는 이기주의자가 되어 행동했으며 결국 검은 돈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한 정보 추적이 대단히 어려운 듯하다.

미국 핵개발 프로그램에서 비슷한 닮은 인간들 유형이 있는데 찾아보면 돈키호테 같은 놈으로 알려진 오픈하이머 보다는 후안무치 수준의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에드워드 텔러일 것이다.

인도 보팔에서 태어난 칸은 수백만의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에서 이공계 학업을 하게 되었는데 상당히 조속했던 칸은 과학과목들을 수강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유럽 그리고 최종적으로 1972년 벨기에 루벤의 카톨릭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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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972년 칸은 암스테르담의 FDO (Physical Dynamics Research Laboratory)에서 근무했다. FDO는 네덜란드 회사 인 Verenigde Mchine-Fabrieken의 자회사로 서유럽의 가장 중요한 원자력 시설 중 하나 인 URENCO 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는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연료 수급 자립을 위하여 히로시마 폭탄에 사용 된 연료와 동일한 농축 우라늄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1970년 URENCO를 창설했다.

우라늄 농축 공장은 네덜란드 알멜로 (Almelo)에 위치해 있었고 고도로 분류 된 초원심 분리 기술을 사용하여 분당 최대 십만 회전에 의해서 으로 2개의 동위원소를 회전시켜 풍부한 U-238로부터 핵분열이 쉽게 가능한 소량의 U-235를 분리해냈다. FDO는 URENCO 외주 업체 및 컨설턴트였는데 Khan을 포함한 직원들은 기술적으로 엄격한 보안 통제를 받았다.

칸은 그가 어디를 가든 친구들을 잘 사귀었던 철저히 호감을 받는 동료로 인정받았기에 칸 (Khan)은 FDO에 의한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이 URENCO에 열정적으로 추천 하였다. FDO는 11 년 동안 서부지역에서 네덜란드 국민과 결혼하여 살았다는 점을 주목했다. 네덜란드 보안 서비스팀은 (BVD)는 Khan에 대한 연고 배경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수사에서 칸의 부인이 전혀 네덜란드 사람이 아니고 단지 영국인 여권을 소지하고 네덜란드어를 할 줄아는 남아프리카사람인줄 알아냈지만 무시하였다. 칸은 빨리 사탕과 과자로 비서관을 만났고, 이웃과 배구를 하러 나갔다. 주말에는 아내와 딸 둘을 해변가나 아르덴에 데려 갔다.

고용 된지 일주일 정도 지나 칸은 Almelo로 보내졌다. 이때가 바로 칸이 우라늄 공장을 방문하게 된 처음이었다. 칸은 기술 문서 번역 업무도 담당했는데 이 문서들을 FDO 의 축복속에 자주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칸은 Almelo 공장의 모든 설계 계획뿐만 아니라 초원심분리기 부품을 공급하는 회사 사람들과도 철저하게 친해졌다.

비밀 첩보

칸의 알 메로 (Almelo)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의 입수는 1974 년 가을, 공장의 가장 비밀스런 지역에서 16 일을 보냈을 때 이루어졌다. 그의 업무는 원심 분리기 기술의 돌파구에 대한 고도로 분류 된 보고서를 독일어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16 일 동안 유쾌한 젊은 파키스탄인 온 사방을 쑤시고 다녔다. 한 동료가 왜 네덜란드어나 독일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쓰고 있는지 묻는 질문에 칸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가 손에 공책을 가진 채 공장 주위를 끊임없이 돌아 다녔다는 것을 알아 차렸으나 아무런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칸이 언제 파키스탄을 위해 간첩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그는 스파이로서 확실히 이상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애국자 가족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교사였고,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는 군 장교 출신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외형적인 유쾌한 면들이 그의 쓴 과거를 은폐했다는 점이다. 칸은 영국이 통치 중이었던 1935년에 보팔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1947년 연국의 인도의 종교문제를 감안한 인위적인 인도의 분리 과정에서 무려 1400만의 이주민이 발생하고 100만이 사망했던 그 시절에 인도로부터 파키스탄으로 이주해야 했었다. 그는 종종 " 사람들이 나라 없는 사람들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자신의 삶보다는 너무나 깨끗한 이 나라를 보호해야한다"고 덧붙였다.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이나 파키스탄인들은 영국이 비열하게 종교문제를 악용했다고 말할지도 모르나 영국이 종교 문제를 악용함이 없이 하나의 인도로 독립시켰다 할지라도 악덕 종교 정치인들에 의해 결국은 두 개 아니라 여러 개로 쪼개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후진국이라 볼 수밖에 없는 이러한 후진국에서는 지금도 종교 문제로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이웃한 미얀마의 무슬림 로힝야 족 문제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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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열 문제에 대해서도 칸은 핵이 있었으면 파키스탄의 영토가 지급의 배 이상은 되었으리라는 망상을 하는 듯하다.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처럼 땅만 넓고 인구는 많고 인간 이하의 찌든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영토 욕심을 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계속된 후속 조사에서도 네덜란드는 그가 스파이로 네덜란드에 파견되었다는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파키스탄 정부에 접근했는지 또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 이던지, 그는 1974년 5월에 인도가 평화 폭탄을 터뜨린 후에야 URENCO에서 비밀을 끄집어내어 이슬라마바드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 멜로에서의 체류는 간첩 활동에서의 피날레는 아니었다.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

1976년 1월, 칸과 가족은 갑자기 네덜란드를 떠나 파키스탄에서 나타났다. 그의 아내는 예전 이웃들에게 휴가 중이며 남편이 편지에 아프다고 썼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칸 스스로 FDO에 사직서를 보냈다. 모든 것이 멋지고 깔끔하고 즐겁웠다. 스마일 칸은 서유럽에서 가장 비밀스럽게 보호받는 산업 보석에 해당하는 비밀을 훔쳐 냈던 것이었다. 칸이 훔친 기술 자료와 버금갈 정도로 중요성을 띄는 것은 URENCO에 대한 유럽 전역의 부품 공급 업체 리스트로서 파키스탄이 필요한 부품을 만들 때에 가장 필요한 정보였다.
칸은 곧 막 시작된 파키스탄 프로그램을 이끌기 위해 이슬라마바드 남쪽의 카후타의 본부에서 핵심 기술과 그가 네덜란드에서 배운 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비 확보를 위해 새로운 노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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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동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됨에 따라 영향을 받은 부토 수상이 1976년까지 제작 완료할 목적으로 파키스탄에서 군부의 주도하에 유럽에서 일하던 칸을 불러 참여시키는 핵 프로그램이 시작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카나드에서 원심 분리기 부품을 밀수입 한 파키스탄 요원들의 네트워크에 작성된 20 통 이상의 편지에 의하면, 칸은 그의 팀의 성공 레이아웃을 계획했다. 그는 핵심 요원의 여행이라든지, 지멘스, 유니온 카바이드 및 다른 회사의 카후타 건물 건설에 대한 역할, 그리고 일반 밀 생산 기술에 대한 데이터를 요청했던 것보다도 쉽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가 미 상무부로부터 요청하는 기술 문헌들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으로 지시했다.

그 다음 몇 달 몇 년 동안 동일한 내용을 볼 수 있었다. 파키스탄이 몇 년 안에 원자 폭탄을 폭발 시험을 할 수도 있다는 CIA로부터 유출된 혐의에 대응하여 1978년부터 1988년 사망 시까지 재임했던 지아 울하크 (Zia ul-Haq) 파키스탄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획득 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칸은 그렇게 신중하지 않았다. 그는 1990년 11월 파키스탄이 우라늄 농축을 통해 "필요한 경우"원자탄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도의 핵 프로그램

noname05.png한편 인도의 핵프로그램은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 이전부터 연구를 해 왔으나 그다지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으며 오히려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인지하고 나서 1980년을 넘겨 인디라 간디 수상이 집권한 후 파키스탄이 핵 프로그램 진전에 따른 자심감으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게 됨에 따라 항공기술자 출신인 Abdul Kalam 에 의해 주도되었다. kalam 은 인도의 미사일 R&D를 주관하였으나 90년까지 핵 프로그램도 함께 병행하여 90년대 말 미일의 경제 제재를 무릅쓰고 5회의 핵실험을 통해 인도를 핵 보유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파키스탄의 칸 박사와 시기적으로 핵경쟁을 주도하였으므로 라이벌이 될 만해 보이며 Kalam 은 2002∼2007년에 인도의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파키스탄에서 탄생한 국가 영웅이 IS???

한 과학자에서 일약 국가 영웅이 되었다. 이라크의 자파르 자파르 (Jafar Jafar)와 이스라엘의 유발 네먼 (Yuval Neeman)과 같이 과학자 출신 매니저로서 서방에서 교육 받았지만 여전히 궁극적 인 애국자였던 것처럼 칸 박사는 당시 국가 영웅이 되었다.

그는 카후타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된 연구 기관 칸 R&D 연구센터의 수장이 됨으로써 그 애국심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는 그의 업적이 공개 된 후에 서방 언론에 의해 엄청난 스파이로 묘사되었지만, 그것에 관한 언급을 회피하고 파키스탄이 결코 외부로부터 은밀한 도움 받았음을 부인했다. 1990년 파키스탄 사서들과의 인터뷰에서 "카후타에서의 모든 연구 결과는 우리의 혁신과 투쟁의 결과였다." "우리는 해외에서 기술적인 노하우를 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연관된 서적, 잡지 및 기술 논문 사용을 거부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한 때 파키스탄 국립 사법 연구소에서 금메달을 받은 칸은 카후타가 파키스탄을 세계의 핵지도에 올렸다고 자랑했다. 그는 유럽에서의 오랜 체류와 "여러 나라와 제조 회사에 대한 친밀한 지식은 자산"이라고 덧붙였다.

칸의 명백하게 평온해 보이면서도, 거의 자기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 속에는, 한 사람의 헌신적 인 회교도 과학자의 가슴을 때렸다. 사실 그는 종종 자신의 나라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엄격한 비밀 유지 요구에 따라 그것에 대해 자랑 할 수 없다는 점과 서방 세계에서 그것을 비난하는 사실 사이에서 저항할 수없는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모순되게 보였다.

20년 전에 이스라엘의 출현을 걱정해야만 하는 분노 속에서 칸은 그의 비통함을 나타내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서방 국가는 파키스탄의 적일뿐 아니라 이슬람의 적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란의 의견과 하등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파키스탄 대신에 다른 어떤 무슬림 국가도 이러한 진전을 이루었다 해도, 서방은 그것에 대해 똑같이 유해하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이라크와 리비아가 바로 좋은 예가 아닌가?

2013년 오늘날, 칸은 장미 꽃잎으로 샤워를 받았고, 그의 역사는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축구팀인 A Q KHan Eleven은 칸 박사의 이름을 땃으며, 파키스탄은 핵 실험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 할 예정이다.

그는 원자탄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폭탄을 운반 할 가우 리 (Ghauri) 미사일도 담당하고 있다. 그의 폭탄에 대한 의문들도 남아 있다. CIA는 1998년 여섯 차례의 성공적인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은 아마도 두 개 내지는 세 개는 건졌을 것이나 나머지는 불발탄으로 믿고 있다. 이 대목에서 주의해서 볼 것은 북한 역시 파키스탄이 1990년대 말에 수행한 6차에 걸친 핵실험 경험을 입수했다면 2010년 이후 모든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해버린 상황에서 횟수를 충분히 줄일 수도 있었을 텐데 6회를 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의 핵기술은 파키스탄의 짝퉁 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수소탄 실험까지 완료했으리라 보인다. 아울러 북한 지역에는 고품위 천연 우라늄이 대단히 풍부하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1990년대 말 인도가 시행한 핵실험 횟수가 총 5회였는데 수소탄 실험까지 포함하고 있다.

칸의 핵 암거래 네트워크와 호갱 북한

아래의 지도는 칸이 원심분리기 우라늄 농축 핵 암시장 거래를 위해 구성했던 칸 네트워크의 공급망 시슬(supply chain)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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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1980 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핵 에너지의 실용화와 핵무기 개발 체제 완성에 초점을 맞추어 우라늄 제조 설비를 가동하고 고폭 폭발 시험을 실시했다. 1985 년에 북한은 NPT를 비준하였으나 1992 년까지 IAEA와 필요한 안전 조치 협약을 포함하지 않았다. 1993 년 초 북한의 초기 선언을 검증하면서 IAEA는 이 선언이 불완전하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북한이 요구받은 특별 검증을 거부했을 때, IAEA는 UN 안전보장이사회에 비준 사항을 보고했다. 1993년 북한은 NPT 탈퇴를 발표했으나 철수는 연기했다.

클린톤 대통령 시절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미국 정부는 북한 군축을 위해 북한에 경수로 2기를 공급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그러한 원자로는 "북한의 흑연 감속 원자로보다 확산 저항력이 더 강하다". 그러나 "핵 확산 방지"는 아니다라는 의견이 있었다. 제네바 합의 이행은 성립되었고, 2002 년 합의 프레임 워크는 각자의 책임을 나눠 가졌다. 아울러 파키스탄은 2002년까지 북한이 1990년대 후반에 파키스탄의 핵 기술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파키스탄, 리비아로부터의 증거와 북한 자체의 여러 고백에 기초하여 미국은 북한에 비준수와 원유 수송 중단을 비난했다. 북한은 나중에 공개적으로 죄책감을 고의적으로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2002년 말까지, 제네바 기본 틀은 공식적으로 포기되었다.

2003 년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 (NPT) 탈퇴를 다시 발표했다. 2005년에, 그것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시인했으나 핵 계획을 종결하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첫 핵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지하 핵 폭발이 탐지되었고, 그 수확량은 킬로톤 (kiloton) 미만으로 추산되었고, 일부 방사능 생산량이 검출되었다. 2007 1 6 북한 정부는 국제회의에 아메리슘 샘플을 들고 나와 핵무기 보유 여부를 확인했다.

북미 정상회담의 방향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강화

호사가들의 입방정에 의하면 곧 남북통일이 될 듯 떠들고 있으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듯하다. 특히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 주도로 과연 아시아에서 완벽한 평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핵심산업(?)이었던 군산복합체는 그대로 소멸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북핵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어 나갈지 세부적으로 짐작하기는 어렵다. 즉 볼튼이 요구하는 것처럼 북한의 핵 프로젝트 보고서를 미국에 순순히 내어 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든 핵 문제를 적정 수준에서 봉합한 최후 결과는 적어도 중미가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구도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공산이 크다. 이점에 관해서는 북이 중미 사이에서 어느 정도로 스탠스르 가져가는냐는 문제인데 아무래도 조금 미국측으로 경도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뭐하러 미국과 그렇게 회담을 원했겠는가?

한편 요즈음 무역 문제로 크게 떠들고 있어 마치 중미가 무역대결로 어느 한 나라가 끝장날 듯이 떠들지만 적어도 어느 한쪽이나 아니면 쌍방 간에 피해를 예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지만 패권국가인 미국의 최종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시아 지역에 냉전에서의 대립 구도 못지않은 적절한 군사적 긴장을 해소치 않고 그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남겨둘 공산이 크다. 그 이유는 미국의 핵심 산업인 군산복합체의 존재 이유를 위해서라도 아직은 아시아의 평화 구축은 시기상조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김정은의 비핵화라는 것도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런지 글쎄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어쨋든 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시아 정세의 부분적인 정세 변화는 예고가 될 수 있겠지만 극히 일부에 국한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최근 문 대통령 방러에서 보듯이 중국을 제외한 남북러 협력 사업이 전개될 가능성이 좀 있어 보인다. 이미 러시아는 냉전의 악의 축 역할을 하기에는 경제력이 너무 약하며 보유자원 중 천연가스와 원유 수출을 원하는 착하디 착한 반려견 수준이다. 반면에 북한과 중국 접경지대 사이에 새로운 상태의 군사적 긴장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극단적으로 북한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는 경우 한반도에 더 많은 사드배치를 비롯하여 상당히 강한 군사적 긴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며 아울러 중국은 등소평이 주장했던 도광양회를 지키지 않은 후폭풍으로 막중한 군비 부담을 해야하는 시대가 조만간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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