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을 때, 더 정직하게는 쾌의 보존과 불쾌의 배제를 최종적인 것이자 유일한 목적으로 삼을 때, 그는 가장 비소해진다. 그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뿐더러 쾌조차도 견딜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를 아프고 지치게 한다. 그는 때때로 호흡을 늦추고 정원 속 식물이 된다. 무엇도 해치지 않고 무엇에게도 해침당하지 않는. 욕망도 고통도 버리고 최소한의 삶만을 남겨 놓으려는 조로증. 결벽증자가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의 영역은 점점 좁아져간다.
그들에게 삶은 안전한 최소한만을 영위하며(행복을 보존하며, 쾌의 값을 +로 유지하며) 숨이 멈출 때까지 견뎌야 하는 것이 된다. 행복 개념은 삶을 1초도 더 능동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그곳에서 삶은 살아진다. 삶이 지속된다는 것, 어떤 행복한 지점에서 정지하지 않고 고통스런 바다로 계속 나아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이고 맹목적인 본능일 뿐이다. 그것은 삶의 무서운 수수께끼며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진정으로 어리석은 것은 퓌로스가 아니라 키네아스다.
침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한다. 이타카의 침대는 언제 가장 위험해질까?
행복은 신적이다. ― 관념적이다. 비속하다. 인간의 본질, 인간의 운명은 정반대를 향한다. 서사는 인간성의 형식이고, 행복은 서사와는 양립할 수 없다. 길 위에는 행복이 없다. 노래만이 있을 뿐.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행복이 아니다. 날개다. ― 정반대로 오해되곤 하는. 영원한 행복에 이르기 위한 것으로 추구되고는 하는. 그러나 행복과 서사가 공존할 수 없듯 신과 날개(ala)는 함께할 수 없다. 신에 대한 가장 호의적인 정의: 고통에 대한 기만적 의미 부여. 연기된 행복. 보상으로 약속된 영원한 행복. 연기됨으로써 영원해진 행복. 고통을 감춰버리는(혹은 자신의 머리를 땅 속에 묻는) 최저의 의미 부여 방식. 나는 것을 포기한 타조의 방식. 멈춰버린 세계. 멈춤으로써 정당화된 세계.
진정으로 병든 자는 고통스러워하는 자가 아니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변호하지 못하는 자다. 행복 이외의 삶, 수동적·반응적 방식으로 정의되는 삶 이상을 알지도 욕망하지도 못하는 자다. 목적 없는 세계 속 가득한 고통에 가시를 세우고 움츠러든 자다. 아파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버린 자다. 똑똑하고 피곤한 현대인들. 자유주의적 개인들. 고슴도치들. 그러나 아무리 움츠러들어도 공간이 좁아질 뿐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포르투나는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만큼 약한 자에게는 집요하도록 잔혹하기 때문이다. 약한 자 ― 자신의 운명을 자아내지 못하는 자. 자신의 시계침을 가지지 못한 자. 포르투나의 모래 속에 머무르는 자.
고통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목적이 필요하다. 물론 고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존재를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마땅히 추구할 지혜다. 거기에는 무한히 풍부하고 섬세한 가능성이 있다. 에피쿠로스식의 소박함은 많은 경우 최선의 상태를 주는 지혜일 것이다. 문제는 「최선」의 의미다. 역량을 최선으로 보존하고 증진하기 위한 분별과, 그 자체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명제가 된 행복은 다른 것이다. 의미에서뿐 아니라 구체적 실천에서조차도. 행복을 쫓는 소소한 길에는 또한 언제나 무절제와 소모가 놓여 있다. 낭비처럼 자유롭지도 풍요롭지도 않은 쩨쩨한 무절제와 소모가 ― 그렇기에 더더욱 막대하고 치명적인 무절제와 소모가. 쩨쩨한 목적은 삶의 회로 자체를 쩨쩨하고도 소모적으로, 가장 나쁜 의미에서 모순적으로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고통보다 높아지는 것이다. 사실 고통을 없애는 길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본질로서 추구되지는 않겠지만.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다 이런 식이다.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