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파도는 혹독한 겨울 고비를 넘기고 어느덧 봄꽃을 피워내고 있
었다. 겨우내 사람들의 살속에 박혀있던 얼음조각이 녹아 시냇물을 이
루고 그 시냇물이 강을 이루고 다시 강들이 모여 바다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바다는 사람들이 흘린 물로 이내 만수를 이루고 사람들의 한해
소망들이 각각의 꼬리를 달고서 물속에서 어류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삼락에게도 새해 소망이 하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맘때쯤이면 바
다 수위도 높아져 그물에 달린 부레를 높이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
면 깊어진 그물로 더 많은 물고기들을 잡아올릴수 있는 것이다.삼락은
이제 제법 커진 사업장을 더욱 키워 배터지게 돈을 삼켜버리고 싶었다.
쌍끌이 어망으로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돈을 냉동창고에 털어놓고 시
간을 얼려버리고 싶었다. 싸가지 없고 재수없는 돈을 꽁꽁 얼려두었다
가 쓰고싶을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야금야금 조금씩 꺼내 쓰고 싶었다.
돈에 붙은 얼음이 녹아 해동 되는 것을 보며 그는 강아지같은 웃음을
세상에 흘릴것이다.
배신자 뚱땡이 새끼는 진짜로 공고엘 들어갔다.과는 당근 자동차학과
를 선택했다.나는 심심할때 마다 녀석을 불러서 몇대갈겨주며 괴롭히
다가 그마저도 재미가 없어서 관둬버렸다. 대신 그의 친구인 비 인
기남을 데려다가 조졌다.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인 뚱땡이를 괴롭히기보다 그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니까 뚱땡이가 더 극렬하게 반응을 했다.뚱땡이의 절
친인 비인기남이 저때문에 피떡이 되어서 병원에 실려갈 때마다 뚱땡
이는 발작적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내가 웬만해서는 다른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무감각한 편인데 땜통처럼 군데군데 파인 뚱땡이의 허
연 대갈빡을 볼 때마다 그것이 마치 해골에서 흐르는 눈물처럼 느껴
졌다. 나는 뚱땡이가 보는 앞에서 비 인기남을 계속해서 조졌다. 퍽
..와직..퍼벅...
"보쓰.. 아니 삼락아,내 새끼손가락 하나로 모자라면 차라리 내 팔목
을 잘라가. 그리고 제발 비인기남은 그만 괴롭혀.제발 그를 놓아줘."
뚱땡이는 애걸복걸하며 비인기남을 구명하려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비인기남을 괴롭히고 갈구었다.그리고 거기서 재미를 느
끼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뚱땡이의 머리통에 난 하얀 땜통자국을 보
며 영혼이 흘리는 눈물을 보았고 그의 흰눈물은 나에게 백색마약처럼
자극적인 판타지를 제공해 주었다. 흰색은 매우 중독성이 강했다. 중
독은 나라는 인간의 내부적질서에 균열을 일으킨 대신에 새로운 세상
을 열어보여주었다.
"오빠는 너무 이기적이야. 나쁜사람이야.자신밖에 몰라. 나 이제 그
만 떠나야 겠어. 안녕.."
중학교때 사귀던 여자애가 마지막으로 나의 낡은 운동화에 침 자국처
럼 남기고 떠난 말이다. 나는 잘가란 말도 해주지 않았다. 잘가길 원
치 않았으니까. 그녀가 처음으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좋은사람이란 나한테 극진하게 잘 대해주고 내마음을 잘 다독여 주
는 사람이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나만 좋아해주고 이해 해주는 사
람이고 그래서 내눈에 달콤한 사람이야. 그사람이 좋은 사람이야. 오
빠는 정말 좋은 사람인것 같아. 좋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것같아.]
좋다고 몸까지 대주며 따라 붙을땐 언제고 이기적이라 떠난다니.계집
아이가 징징대며 사랑을 울부 짖는 신파극을 보는 듯해 역겹다. 이건
그냥 사춘기에 막 접어든 어린계집아이가 지 머리통만한 막대사탕을
쪽쪽 빨아 먹으며 그 찰나의 달콤함을 가지고 사랑이라 외쳐대고 있
는 꼬라지인 것이다.오로지 자신만을 중심에 두고 이기적인 혓바닥을
뱀처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좋은사람 나쁜사람이 따로
없다.그져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고 있는 철없는 어린계집 아이가 있
을 뿐이다.
내가 그때 야구를 알았더라면 아마 그녀의 뇌를 향해 짱돌 체인지업
을 던졌을 것이다.엄청난 운동량을 가진 돌맹이는 그녀의 뇌속에 쳐
박혀 심판의 추임새도 나오기전에 사람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냈을 것
이다.
직구처럼 잘 뻗다가 갑자기 45도 각도로 삐딱하게 떨어지는 습성을
가진 체인지 업처럼 삐딱선을 타버린 그녀.나의 무엇이 그녀로 하여
금 사랑을 이기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놓아버렸는지 그녀의 뇌속을
그렇게 까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나면 생각치도 못
한 변수가 그녀의 뇌속에 곰팡이처럼 덕지덕지 쳐달라붙어 있을 것
이다. 터져버린 해골을 사이에 두고 외과수술을 앞둔 의사들이 분주
히 움직일 것이다.
사랑따위는 지똥을 씹어먹는 똥개새끼한테나 줘버리라해.킥킥. 친구
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처럼 뜨거운 것은 아마 없을거야.저 뚱땡이새
끼 정말 매력적이야. 친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다니 이런세상에 말
야. 낭만적인 돼지새끼. 그러나 아직 하이라이트는 남아 있다. 나는
반드시 네놈이 아닌 네 친구인 '비인기 남' 의 팔을 싹뚝 잘라 버릴
테다. 그래서 백골만 남은 네놈 머리통을 구경하고 말테다. 무한한
자책에서 빗어지는 인격 침몰의 광휘를 맛볼 것이다. 킥킥..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학교에서의 나의 황제생활은 전혀 변함이 없
었다. 아니 오히려 중학교 시절보다 더 계급의 분류가 더욱 뚜렷해
져서 최상위에 올라앉아 있는 나에 대한 예우가 극진했다.야구부 내
에서의 대우도 불편함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나보다 한학년이 위인 야구부원이 시원하게 시야시가 된 개또레이를
건네주고는 인사를 꾸벅했다. 앞으로 잘 좀 봐달라고 하는거 같은데
그건 뭐 앞으로 저하기 나름이지 뭐. 꿀꺽꿀꺽..원샷..
운동장엔 야구부원들이 구령을 붙여가며 단체훈련을 실시하고 있었
다. 기초체력훈련을 모두 마치고 타격 연습과 함께 톡톡 튀어오르는
땅볼을 받아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봄인데도 벌써 기온이 25도를
육박하고 있었다. 아지랭이가 솔솔 피어오르며 누리끼리한 운동장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좀더 쉬다가 연습을 하려고 감독이 준 책자를 꺼내 보았다. 무슨 야
구설명집 같은건데 기술적인것 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
MLB 에서 사이영상 2회 수상하고 올스타에 무려 7회 선정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1995 년엔 월드시리즈 MVP수상한 사나이가 이런 명언
을 남겼다.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캬 졸라게 멋있다.160km 후반대를 자랑하는 나의 직구.고등부에서는
그 어느누구도 감히 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나의 공은 과연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허무와 감동이 꽈배기처럼 교차해가며 머리속을 어
지럽했다. 나도 왠지 당장 운동장으로 뛰어내려가 뜨거운 열정을 가
지고 스피드건을 조롱하듯 광속구를 팍팍 후려대며 세상을 환호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해서 불우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고 싶
었다. 나는 그 명언을 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침을 살살 발라
가며 오래도록 혼자 조용히 음미해 보았다.
배도 출출하고 해서 손가락 부상으로 옆에서 쉬고 있는 놈한테 발로
툭차며 심부름을 시켰다.
" 얀마, 가서 꽈배기하고 담배하나 사와."
"음료수는 뭘로 할까요."
"워셔액(게토레이 블루볼트)큰걸로 하나."
가만히생각해보니 내가 야구를 해야만하는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사
람들이 내가 던진 공의 속도에 놀랄때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
졌다. 마치 이 세상에서 나만 가지고 있는 재주처럼 느껴졌다. 사실
내공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소문을 듣고 대학야구부 감독이나 프로리
그에서 이미 입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공의 완성도가
만족 할 만큼 다져질때까지 연습만 하기로 했다.미친 꼴통감독과 함
께. 그런 나를 보고 '러브 콜'을 보내오는 스카우터들의 마음은 더
욱 애타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미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지르는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되어 아주 평범한 사람들과 아주
평온한 일상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진 자폐는 평범한 사람들
의 저녁 불판에 올라 지글지글 타 오르며 술안주가 될것이다. 그러
면 나는 그동안 날 괴롭히고 있던 지독한 자폐의 연소된 연기를 마
치 먼 옛날의 아린 추억처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가 후륵 뱉어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주 한잔의 단맛을 찬양할 것이다. 세상 참
아름다울것 같았다.
"여..우리 삼락이 벌써 나오셨네.자 담배 한대 피우고 시작해 볼까."
꼴통감독이었다.지가 데리고 있는 야구부선수한테 담배를 권하는 미
친감독은 대한민국에 아마 이 작자밖에 없을 것이다. 첨부터 하는짓
이 심상치 않더니 점입가경이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 세상에 대해 불만이 더많은 인간 같았다.내가 어떻게 나오나
슬쩍 간보는 것 같은데 날 뭘로보고 지랄이지.
나는 별로 땡기지도 않는 담배를 부러 한까치 뽑아 입에 물었다. 라
이타켜는 시늉을 하며 감독을 바라보자 감독이 피식웃으며 담배불을
붙여주었다.
"맛있냐?"
"맛없어."
"근데 왜 피우냐?"
"습관.."
"운동선수한테 담배가 치명적인거 몰라?"
이거지금 뭐하자는 플레이지? 담배는 지가 줘놓고 해롭다니.지금 병
주고 약주고 담배주고 사람 약올리나? 그동안 약간 생겨있던 믿음이
순식간에 휘발되어 버렸다.나는 담배 눈깔을 감독을 향해 날렸다.빨
간 불똥이 감독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별일 아닌것처럼 손으로 탁
쳐내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봐도 꼴통이었다.
"담배끊어 그래야 선수생활 오래한다."
"선수 안 해. 야,야구는 그냥 취미야."
"오오 그랬어? 그래서 그렇게 손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을 했군. 밤
새도록."
초등학교 6학년이 자신이 땅바닥에 떨어뜨린 알사탕을 남 몰래 주워
먹다가 딱걸린것 보다 더 쪽팔렸다.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황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씨발 재수없어."
"킥킥..딱걸렸지."
나는 그길로 운동장에 내려가 볼을 던졌다.대기하고 있던 포수가 헐
레벌떡 뛰어나와 자리를 잡고 볼받을 준비를 했다.나는 포수에게 직
구싸인을 보낸 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와인드업을 했다.
(그래 내가 지금 던지는 것은 볼이 아니야. 내가 세상에 보내는 구
원의 메시지야. 나는 이세상 사람들과 소통해가며 오래토록 행복하
게 살고 싶다.이 공이 그 소통의 씨앗이 되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될
것이다.야구에 대한 나의 애절한 소망은 절대로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을 것이다. 대신 사람들의 가슴속에 문신처럼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