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희연이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도시락을 싸들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모텔말고 언덕으로 올라갔다.계절은 이미 겨울로 향하고 있었지
만 남쪽지역인 이곳은 1월이나 되어서야 겨울같은 추위가 몰려 온다.
바다위에도 계절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수온이 낮아지자 부영양화로 인
해 생겼던 적조가 사라진 바다는 푸르스름한 색으로 제얼굴을 되찾고 있
었다. 푸르름은 지금의 내 마음속에도 들어와 있었다. 내가 희연이를 바
라보는 마음 바로 그빛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나의 무겁고 음울한 암
청색의 마음이 순백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그녀의 마음과 섞여서 바다
빛처럼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말없이 끌어 안았다. 암청
색을 벗어나 저 바다색을 닮기위해서 말이다. 저 하늘빛을 닮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절벽끝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희연은 내 어깨위에 살며시 기대고
는 발을 까딱거리며 흔들었다.누구라도 하나 중심을 잃기라도 하는 날이
면 같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도 무섭
지 않았다. 희연이와 함께라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그네를 타는 기분
일것 같았다.그네가 희연과 나를 까마득하게 먼 지구의 저 아래 지옥으
로 떨어트릴지라도 우리는 깔깔대며 웃음을 퍼올릴 것이다.
희연은 노트를 찢어 종이비행기를 접었다.그리곤 바다를 향해 던졌다.종
이 비행기는 바람을 타고 바다 저멀리로 날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바다
를 향해 꿈꾸어 온 듯 쉬지않고 날았다.푸른바다 위를 하얀꿈을 꾸며 멀
리멀리 날았다. 어느새 희연은 울고 있었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
었다. 나는 팔소매를 잡아당겨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종이 비행기는 바닷물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아 촉촉히 눈
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다는 마치 종이 비행기가 흘린 눈물처럼 출렁거
렸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종이비행기가 다시하늘로 날아올랐다.혹등고
래 한마리가 숨구멍으로 종이 비행기를 하늘높이 쏘아올린 것이었다.고
래는 떨어지는 종이 비행기를 코로 받았다. 그리곤 마치 물개쑈에서 보
는것처럼 코에 비행기를 올려놓고 먼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갔다.
(뭘까 희연이가 가진 상처는.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바다같은 눈물을 흘
리게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녀와 계속공감하기 위해서. 누군가와
이렇게 생각을 나누는건 처음인것만 같았다.생각을 반으로 나누면 생각
의 폭이 그만큼 작아질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도 생각의
폭이 넓어져 있었다. 생각의 틀도 더 깊어지고 있었다.
희연을 볼때마다 이 여자애가 나와 함께 지구상 마지막 남은 인류가 아
닐까 생각해본다. 나머지는 인간이 아니라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처럼만
보였다. 미개하고 버릇없고 무례하고 생각 없이 삶을 살아가는 저질 감
성의 생명체들 같았다. 그녀와 나는 마치 무감각의 세상속에서 홀로 외
로이 떨어져 동동 떠있는 감성의 섬처럼 행복했다.
타자는 기다리고 있던 직구가 날아오자 크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
나 내가 던진공은 직구가 아니었다. 직구와 거의 동일한 손목모양과 각
도에서 날아갔지만 나는 공을 쥔 손의 중지와 검지를 최대한 크게 벌려
서 잡았다. 이렇게하면 공에 실리는 손가락 힘이 분산되기 때문에 공의
구속은 현저하게 떨어지고 따라서 볼이 떨어지는 각이 커지게될것 같았
다. 확신은 없었지만 왠지 그럴것만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타자를 속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어 공을 던졌
는데 나도 모르게 스플리터를 구사하고 있던 거였다. 스플리터는 타자
앞에서 급격히 떨어지며 헛스윙을 유도해 냈다. 헛스윙을 하고난 하이
에나는 얼굴이 하늘 높이 들어올려져 헤드업이 되어버렸다. 그는 순간
하늘이 파랗게 자신을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타자는 울그락붉그
락 상기되어 타석을 벗어났다.감독은 버릇인듯 자신의 손바닥에 반복적
으로 볼을 탁탁 던져넣으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은 내게 다가왔다.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지. 배운적도 없는데 변화구는 어떻게 던진거냐?
방금 그거 스플리터인거 알어?"
모른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할거 같아서 그냥 아는척을 했다.
"씨발 바본줄 아나."
"넌 몸의 벨런스도 좋지만 손가락스킬이 기가 막혀. 타고났어 아주.그
래도 그거 자주 던지지는 마라. 팔꿈치 빠게진다."
스플리터는 공을 쥔상태에서 검지와 중지를 크게 벌리고 던지기때문에
이 벌어진 손가락이 팔근육을 팽팽하게 수축시키고 팔꿈치를 긴장시킨
다.이 상태에서 공을 휘둘러 던지게 되면 자칫 팔꿈치에 큰 물의를 가
져오게 된다. 만약 계속해서 이 구종의 공을 던지면 투수는 극도의 피
로감을 느끼게 된다.피로감 때문에 콘트롤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떨
어지는 각이 밋밋해져 장타를 얻어받기 쉬울뿐만 아니라 무리 해서 던
지면 심각한 팔꿈치 부상을 일으킨다.이처럼 스플리터는 큰 장점이 있
는 볼이기도 하지만 투수입장에서는 자칫 선수생활을 그대로 마감 할
수 있게 하는 팔꿈치 부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높다.투수들 사이에
서 이런 스플리터의 속성을 일컬어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부른다.
잘 제구가 된 상태로 일단 던졌다하면 어김없이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
해내 투수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지만 항상 부상의 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스플리터. 그 공안에 선과 악이 한몸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때론
천사의 얼굴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만 때로는 악마의 얼굴로 한 인간
의 인생을 한순간에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삼락은 감독의 말에 크게 게의치 않았다. 지금까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다치고 상처 받아 온 그에게 팔꿈치 부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벌써 생각의 팔꿈치를 잃은지 오래
였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접했을때 사고의 유연성을 갖지 못하고 한 방
향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 길고 뻣뻣한 생각의 팔을 크게 휘
둘렀다. 원심력이 가득실린 그 생각의 팔은 다른사람들에게 무차별적
인 폭행을 가하곤 했던것이다.
자폐증이란것은 생각이 이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그곁엔 이미 악
마는 와 있었다. 악마같은 아버지와 악마처럼 미소짓고 떠난 엄마. 이
것이 마치 볼처럼 한데 뭉쳐져 이를 벗어나려는 삼락으로 하여금 길고
뻣뻣한 생각의 팔을 휘두르게끔 만든것이다.
감독은 이런 날보고 승부사기질이 있다고 했다. 담배 피우고 술마시고
여자따먹고 감독말 더럽게 안 듣고 욕지거리나 하는 행동을 빈 깡통에
모두모아 승부사기질이 있단말로 요약하는 감독. 그것 또한 그의 능력
인듯 싶었다. 왜냐면 내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
이다.
"야구가 재밌냐? 오늘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꾸 오냐?"
딱히 할것도 없고해서 수업끝난 후 운동장엘 들렀다.
"씨발 심심해."
감독은 피식 웃었다.입꼬리가 갈퀴처럼 치켜올라갔다.
(어 날 비웃는건가? 이걸 한방 날려말어.)
"야구 할 놈은 언젠가는 하게 되어 있다."
나는 감독의 말이 그닥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는 신호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감독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너 외로워서 이러는거지?"
(씹알 뭘 안다고.)
"걱정마 야구하다가 보면 그런거 싹 잊혀져. 외로워할 틈이 없어져.왜
냐? 바쁘거든.졸라리 바쁘거든."
"야,야구 안 해도 지금 충분히 바쁘거등. 가게운영하랴 지역구 관리하
랴 여자친구 만나랴..
"..피식.."
감독은 나의 비아냥 거림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방망이를 가져왔다.포
수를 뒤에 앉혀놓고 자기가 공을 던질테니 나보고 한번 쳐보랜다.투수
는 타자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할 줄알아야 한다고 했다.입장바꿔 생각
해 보라는건데 난 그러기 싫은데. 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남의 입장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럴이유가 전혀 없었거든.앞으로도 난
계속 그렇게 살아갈거라고.
감독이 공을 던졌으나 난 내손에 들여있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감독은 계속해서 공을 던졌다.그러나 난 여전히 베트를 휘두르지 않았
다. 포수가 일어서서 감독을 향해 걸어왔다.
"그만하시죠.싫다는데."
"아냐 그냥 앉아서 계속 내공 받아."
감독은 막무가내였다. 계속해서 있는 힘껏 볼을 던지고 있었다. 투수
출신인진 몰라도 공이 아주 이쁘게 날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지루해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푸우..
하얀 담배연기를 뚫고 감독의 공이 지나갔다. 담배연기가 회오리를 일
으키며 일그러졌다.기분이 좀 안좋아졌다. 왠지 내가 감독새끼한테 도
전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들
었다.나는 감독을 향해 야구 방망이를 힘껏 던졌다.지쳐서 헥헥거리던
감독의 머리를 향해 방망이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