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평"이라는 이름은 "독후감 사이 서평 "의 준말입니다. 이름 그대로 독후감과 서평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역으로, 이태원 다음 녹사평 역과는 다릅니다. 다양한 형식으로 제가 읽은 책들을 '큐레이팅'해드리겠습니다.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듬어서 올려봅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후 조금만 읽다 집에 들고 가야지, 하고 시작했다가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치운 소설이다.
저자 요네하라 마리(1950~2006)는 일본 공산당원인 아버지를 따라 열 살 때부터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5년간 다니면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후 일-러 통역사로 일하면서 <마녀의 한 다스><언어 감각 기르기> 등 여러 책을 썼다.
그 중에서도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작가가 1960년 프라하에서 만난 친구 셋을 35년 만에 만나러 찾아나선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영화광 그리스인 리차, 거짓말쟁이 루마니아인 아냐, 지적인 유고슬라비아인 야스나.
세 사람 이야기에서 격동기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작가의 뛰어난 관찰력과 뎃생하듯 인물을 그려내는 필력 덕분이다. 심지어 인물의 특징, 챕터 제목, 챕터의 결말 세 가지가 일맥상통하게 짜놓았다. 결국 사람 얘기가 제일 재미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얻는 조국(일본)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덤이다.
p.31 (일본으로 돌아간 저자가 쓴 편지 중에서)
...그래서 지금 2학년에 다니고 있는데, 무지 놀란 건 한 반에 45명이나 있다는 거야. 수업은 선생님만 일방적으로 말한다는 점도. 그게 또 고통스러울만큼 따분한데 반 아이들은 모두가 잠자코 노트에 받아 적기만 해. 내 동포가 이렇게 얌전하고 인내심 강한 민족인지 미처 몰랐어.
테스트에는 어느 과목 할 것 없이 시험지에서 OX로 답을 고르는 출제 형식이고, 구술시험도 논술시험도 없어.
p.85
하지만 내가 5년 동안 다닌 소비에트 학교를 편들어서가 아니라, 육체적인 특징을 꼬집어 별명을 짓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아니, 그런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귀국해서였다.
귀국한 뒤, 집 근처 중학교로 전학한 직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반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에 대해 뚱보, 대머리, 땅딸보, 덧니, 마당이마 등 본인 인간성과 무관하며 본인의 의지로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을 끄집어내 너무나도 쉽게 놀림감으로 삼는 것이었다. (...) 나는 무신경하고 야만스러운 집단 속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들어 참담하리만큼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p.179
야스민카가 전학 와서 미술 수업을 처음 받던 날, 그녀의 옆을 지나치던 아나트리 일리치 선생님은 발을 멈추고, "어? 으음"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곤 갑자기 교실을 뛰쳐나갔다.
반 아이들은 또 시작했다 하는 눈짓을 보냈다. 이 소비에트 학교 선생님들은 제자의 재능을 발견하면 과장될 정도로 법석을 피우는 버릇이 있다. (...)
다른 이의 재능을 이렇게 사리사욕 없이 축복해주는 넓은 마음, 사람 좋은 성향은 러시아인 특유의 국민성이 아닐까 하고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반세기나 지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