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chipochipo 입니다.
오늘은 조선시대에 일어난 전쟁의 속살을
한번 제대로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무력한 군주와 영악한 당쟁
효종이 북벌론을 외친 진짜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행동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조선이 그에 맞서 싸울 힘이 없다는 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였죠.
항복하자는 주화파와 싸우자는 척화파가 대립을 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된 군대도 없이 궁궐 안에서 대신들끼리
벌이는 명분 논쟁에 불과했죠.
어차피 상대도 안 될 싸움, 빨리 GG치고 항복하는게 국민들에겐 더 이로웠겠죠.
하지만 왕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겠죠.
어차피 질 싸움 오래 버티기라도 해야 전쟁 후
경쟁자와의 권력다툼에서 명분을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부국강병은 국가경영의 기본 이라는 명언이 의외로
순진무구한 소리라는걸 촉이 좋으신 분들은 느낄수 있을겁니다.
만일에 적의 침략이 없고 백성들이 먹고살만하다면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장군은 군을 잘 모르는 국왕에게 부담만 될뿐이죠.
전쟁에 이긴 장군은 자칫하면 국왕의 정적 1호가 될수 있으니
적당히 강화하고 때로는 견제해서
왕과 기득권 집단의 세력을 유지하는 셈이죠.
임진왜란에서 온갖 험한꼴을 본 선조가 공신록에서 애써
이순신을 비롯한 무신들의 공훈을 낮추고 전쟁중에는
의병장들을 일본군만큼이나 경계했던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였죠.
영화 남한산성으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인조와 서인정권의 정치는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남한산성에서의 최명길(주화파)과
김상헌(척화파)의 대립이 치열하지만 실제로 성 밖에 나가
죽기로 싸운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김상헌의 자결시도나
청나라 압송에 함께한 사람도 없습니다.
청나라에서 사업을 크게 키워 성공한 쇼현세자와 부인강씨,
그들의 재력과 선진문물은 인조와 집권세력에게는 정권 불안요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겠죠.
정작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에는 누가 더 도움이 됐을까요?
외부경쟁은 내부의 무능에 대한 징벌
국익이나 민생 같은 가치를 떠나
순전히 인조라는 국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까요.
청태종은 교역과 복속을 바랬을뿐, 직접 조선을 통치하려들지 않았죠.
인조입장에서는 어자피 항복할 전쟁을 최대한 마지막까지 싸우자
...라는식의 장엄한 주장에 올라타는 편이 낫겠죠.
이것이 전쟁후 지배체제를 유지하는데도 유리합니다.
실제로 청군에 맞서 싸운 장수들끼리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숙청했는데,
왕이 오래 버틸수록 그 명분은 더욱 공고해집니다.
그의 뒤를 이어 대륙의 패권을 쥔 청나라를 정벌해서
삼전도의 굴욕을 갚겠다는 효종시대 북벌론의 속살은
사실 집권세력의 친위부대 강화정도에 불과했죠.
어자피 청에게 복속한 상황에서 정치적 경재자들을 제압할수 있으니
그들이 원하는 정치는 더욱 공고해질수 있습니다.
청나라의 반발로 얻는 정치 경제적 불이익은 어자피 백성의 몫이고,
군대가고 부역나가는것도 그들의 몫입니다.
이러니 인조와 그의 아들 효종의 입장에서는
무력한 군주로써의 치열한 생존전략이였겠죠.
기술혁신으로 강한군대, 잘사는 경제를 이룩해야한다는 것도
그 시대 기준으로는 순진한 이야기가 됩니다.
새로운 사업이나 해외교역으로 부를 쌓은 거상이 생기고
백성들이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면 통제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죠.
주변국가들의 직접적인 전쟁 압력이나 무역경쟁이 있지 않다면
국왕이나 정치 기득권으로써 쓸떼없이 세상이 흔들려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조선의 폐쇄적 사농공상 체제는 특별한 경재압력이 없는 사대의 틀 안에서
나름 효과적인 지배방식이였죠.
일본제국과 청나라, 러시아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렇게 쓰고보니 그때당시와 현재 김정은의 북조선이 오버랩이 되네요.
역시 북조선의 변화를 위해서는
외부의 어마어마한 압력이 불가피한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