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회사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퇴사자는 퇴사를 하루나 이틀 남기고 전체메일을 보냅니다. 지금 회사에서 5년을 일하는 동안, 퇴사 메일을 백 통 정도는 받았습니다. 입대하고 처음으로 참여했던 누군가의 전역식에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보내고 나면 내 차례가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회사는 군대와는 달랐습니다. 군대는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들어온 순서대로 다시 떠났는데, 회사는 대중이 없었습니다. 두 번은 나갔어여 할 분인 것 같은데 아직도 남아 신년 인사를 보내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단 며칠의 인연만 간직하고 떠났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도, 생각 못한 퇴사 메일을 받게 되면 못내 서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와중에도 눈에 밟혔던 것은, 퇴사 메일이 마치 이전 퇴사자의 메일을 긁어서 쓴 듯 정형화되어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받았던 대부분의 퇴사 메일은 대게 이런 식입니다.
정들었던 ㅇㅇㅇ를 떠나며,
안녕하세요? XXX부서의 홍길동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년의 시간 동안 ㅇㅇㅇ에서 일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그 동안 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김말똥님, 박개똥님, 그리고 YYY부서의 이소똥님께 감사드리며, 일일이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직접 인사드리지 못한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모쪼록 제가 혹시 서운하게 한 점이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다들 건승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제 연락처는 010-38XX-#%XX이고 이메일 주소는 [email protected] 입니다. 밖에서 언제든 소주 한 잔 하면서 못다한 이야기도 나누면 좋겠습니다.
2018년 몇월 몇일
홍길동 배상
처음 한두 통은 그럭저럭 넘겼는데, 백 통 가량 비슷한 메일을 받다 보니 국문학도로서 묘한 답답함이 생기더군요. 특히 서두 부분, '정들었던 ㅇㅇㅇ를 떠나며' 라는 표현은, 몇몇의 퇴사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언제부터 미운정이 고운정을 대체하고 '정'의 메인 자리를 꿰차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남과 다른 퇴사 메일을 보내고자 예행 연습을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은 1차 초안입니다.
제목: 저는 떠납니다.
본문: 안녕하세요? ㅇㅇㅇ에서 5년 동안 근무한 철수2입니다.
저는 오늘부로 회사를 떠납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알고 계셨던 분도 계셨겠지만, 모르고 계셨던 분들을 위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5년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름 번듯한 직장이어서 결혼도 하고, 빚을 내어 전셋방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이 많은 회사입니다. 특히, 함께 일하며 비즈니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해 준 A님, B형, C 상무님께는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형님들의 도움 덕분에 많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 후임으로 들어와서 2년째 고생하고 있는 D님, 당신은 참 똑똑한 사람입니다. 좋은 자양분이 있으니 머지않아 무성한 나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슬기롭게 이겨내기 바랍니다. 물론 이제 제가 나가니 행복한 일만 남았겠지만요. (방심하지 말아요. 회사는 공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갈굴 누군가가 금방 보충될 것이니 충분히 즐기도록..)
이런 일 도와주신 E님, 저런 일 도와주신 F님, 이거 가르쳐주신 G님, 그외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메일을 쓰다보니 무슨 시상식에서 금상이라도 받은 것 같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수상자 분위기좀 내볼까 합니다. 제 생애 여러분들을 다 수신인으로 넣고 메일을 보낼 날이 또 언제가 있겠습니까.
친애하는 ㅇㅇㅇ임직원 여러분,
이 회사는 참 좋은 회사입니다. 제품이 좋다보니, 사실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고객이 먼저 찾아주는 몇 안되는 >강한 회사입니다. 그러다보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데, 안하는 사람들은 계속 무임승차 모드더군요. 뜨끔 하시는 분들 계실겁니다. 네. 맞습니다. 본인입니다. 여러분은 아주 운이 좋습니다. 계속 필드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은 변하고 있고 우리의 상황이 여지껏처럼 좋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전선에 나가있는 첨병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최대한의 노력으로 지지해 주지 않으면, 더이상의 무임승차는 곧 무임하차가 될 것입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정진해 주시기 바랍니다.대표님,
올 해 상여급이 너무 적게 나왔습니다. 옆팀의 무임승차 부장은 저보다 세 배는 많이 챙긴 듯 하루 종일 싱글벙글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은 안하고 밑의 사람들만 죽어나가고 있더군요. 여기가 무슨 공기업도 아니고 이렇게 안일하게 경영하셔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적당히 2~3년 경영하며 폭탄돌리기 하실 생각이시라면, 고객을 한 번 만나보십시오. 나중에 폭탄을 떠안는 사람은 다음 경영자가 아니라 바로 고객입니다.보내기를 누르기 전에 찬찬히 읽어보니 메시지가 너무 과했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어젯밤에 제리맥과이어를 봐서 그랬나봅니다. 그래도 속은 후련하네요. 제리맥과이어도 나중에 잘됐으니까, 저도 나중에는 잘될 수 있겠죠?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불편하셨던 이야기는, 세상사 모르는 철없는 녀석의 치기라고 생각해 주세요.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께
나중에 우연히 만났을 때,
더 멋진 모습이길, 그리고
마주보며 미소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감사합니다.
철수2 드림
어떤가요? 역시 너무 과한가요? 메일 마지막에는 돌아가신 신해철님의 '민물장어의 꿈'을 동영상으로 넣을까 하는데 어떨까요? BGM으로 까는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소스를 구하기가 어렵네요.
이거...
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