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란 벽만큼 얄팍한 것은 없다. 그 뒤에 자신에 대한 불신이 몇 배는 두텁게 서 있고 그 옆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은 현실도피라는 생각이 나란히 팔짱끼고 있다. 그것에서 힘을 얻는다. 현실도피란 걸 알았다면서 철저히 현실로부터 줄행랑도 못치고, 자신을 불신한다면서 주변에 홀깃하며 줏대를 꺽는다. 내 뜻대로도 못살고 남의 뜻대로도 못사는 어중간한 삶. 모두의 현실이 내 현실일 수 없고 자기불신은 자기확신일 수 있는데.
도망쳤다는 사실이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만 도망가서도 괴로움에 자신을 몰아넣기 때문에 진짜 도망자가 된다. 등을 돌리는 것으로는 그늘에서 나올 수 없다. 걸어서 뛰어서 나와야 한다. 도망치기로 했다면 설령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을만큼 멀리 달아나야 한다. 자존심도 남이 내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했다. 자존심이란 건 애초에 없다. 자존심을 지킨다는 말은 내가 아닌 나, 내게 없는 나를 남에게 구걸하는 것이다.
사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거부권도 있다. 친절하고 배려있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이 아니면 인간은 다 쓰레기다. 나도 쓰레기이기 쉽다. 이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