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그 건널목에 선다. 초록불을 기다리다보면 어제 생각한 '내일 속 거기'다. 어제 생각한 생생한 내일이 눈 앞에, 그것을 생생하게 본다. 매일 그렇다. 이러니 미래가 정말 존재하는 것만 같다, 없다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내 미래라는 것은 '아침에 건널목 앞에 서 있음'인가. 어제 떠올린 사람이 같은 차림으로 같은 자세로 서 있거나 걷거나 한다. 오호. 나는 미래를 알게 됐다. 미래가 별 것이 아니군. 멀리도 못가고. 고작 내일이다. 보나마나한 내일인데 왜 이렇게 끈끈하기가 초강력본드같지. 어제도 그제도 또 오늘도 생생한 내일에 붙들려 산다. 집도 어디도 아닌 그 건널목, 그 길, 거기에 들러붙어 '지금'으로 성불 못하는 귀신같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이라곤 건널목 앞에 서기 뿐이다.
나이가 든 사람이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무것도 안하기 때문이고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사람은 사실 매우 게으르다고 한다.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와 뒹굴거리고 주말 휴일을 또 뒹굴거리면서 실상 내가 하는 일이라곤 매순간 건널목에서 기분 나쁘게 신호 기다리기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무덤덤해질 날이 온다고해도 걱정된다. 무덤덤함(기분이 좋아질리는 없고)과 얼마 안되는 돈으로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어쩔 수 없이 살 것 아닌가.
역시나 뭔가 필요하다.
흔치 않게 평일 쉬는 날이라 동대문에 갔다. 주말이면 사람이 많아서 오늘 꼭 가야했다. 일단 밥부터 먹고. 맛없진 않았다. 요즘엔 식당에도 인덕션이 깔렸구나.
자수용품이 목적이었다. 자수바늘, 원단에 그릴 밑그림용 펜, 그리고 자수원단을 사려고 했는데 난 흔하게 쓰는 리넨 원단이 별로다. 조직도 성글고 뻣뻣한 마직물 느낌이 별로. 가지고 있던 마원단보다 더 뻣뻣한 느낌이 들어서 사지 않았다. 대신 손수건용 거즈원단과 워싱면이랑 일반면을 샀는데 그게 훨씬 좋다. 마원단 자체는 어딘가 멋스럽긴 하고 많이 쓰는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조직이 촘촘하고 부드러운 원단이 좋더라고. 촘촘하고 세밀한 자수를 좋아해서 그런가. 원단빨과 귀여움+낭만적 모티프의 자수는 좀.. 사기라고 본다. 인형옷에 레이스 주렁주렁이 사기이듯. 정말 쉽게 예뻐지거든. +ㅇ+ 나는 어쩌면 프랑스자수같은 것보다 전통자수나 동양자수가 맞나보다. 그것도 생각 안한 건 아닌데 견직물 원단에 견사는 부담스럽다.
204색이 4미터씩 감겨있는 세트색실을 샀다. 4미터는 좀 아쉽지만 있는 실이 색번호가 뒤죽박죽이라 표본으로 쓸 겸해서. 씨드비즈를 좋아해서 구경하다 극소비즈가 있길래 그 상점에 있는 걸 싹 걷어왔다. 스팽글에도 좀 미쳐있어서 그것도 내심 점찍었는데 비즈가 꽤 비싸서 아예 구경도 안했다. 가진 게 좀 있기도 하고. 맨 왼쪽의 실버 메탈비즈가 유독 비쌌다. 용량도 많이 적은데 7천원씩이나. 그래도 예쁘니까. 황금빛 골드색이 없어서 아쉬웠다. 정말 예뻤을텐데. 상점주인이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되게 궁금해했는데 이 비즈들의 용도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냥 산거다. 보다보면 생각나지 않을까. ㅎㅎ.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으니 이런 것에나 흥청망청하지 뭐.
롱패딩을 종일 입고 다녔다. 무게가 나가는 거라곤 휴대폰이랑 장갑 정도 였는데 책가방 멘 것보다 더 어깨가 아팠다. 패딩도 가벼운 편이었는데. 잠깐 입는 옷이지 오래 입는 옷은 아니구나. 자세가 문제였겠지. 코트같은 걸 입었으면 묵직해도 아프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패딩은 따뜻한 건 사실이라 한번 입으면 멋이고 창피(길에 입는 사람이 깔렸음)고 나발이고 내복처럼 벗을 수가 없다. 영하 10도는 이제 일상이라.. 롱패딩이 유행인 것도 이해한다. 코트형 슬림다운을 입고 묵직한 모직코트를 입어도 패딩을 못이기더군. 캐시미어 정도 입어주면 되려나. 요즘 코트 입고 다니는 사람보면 추위에 강한 체질? 아니면 멋쟁이처럼 보인다. 멋있어. 차림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집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