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이는 부끄러운 아이였다.
어쩌면 태어난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 하나만 더 넣으려고 나를 낳았다.
아들이 아니었다.
엄마는 탯줄만 막 자른 당근이를 안고 다락으로 올라갔다.
거기 나무 궤짝이 있었는데,
당근이를 궤짝에 넣은 다음 뚜껑을 닫았다.
나를 궤짝에서 꺼내 준 사람은 할매였다.
고기를 넣은 미역국은 아니었지만
출산을 한 며느리 먹으라고 미역국을 끓여 왔는데
아기가 없더란다. 그래서
언나('아기'의 경상도 사투리) 어데 갔노... 묻는데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누워 있고.....
다락에서 뽀시락뽀시락 하는 소리가 들려
다락을 올라가 보니 궤짝에서 그 소리가 났다고....
할매가 뚜껑을 열어 보니
눈이 반들반들한 언나가 울지도 않고 궤짝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 언나가 바로 당근이였다.
출생의 비밀(?)이 드라마처럼
인생의 주요 전환기에 드라마틱하게 밝혀졌다면
내 부끄러움이 좀 덜했을까....
하지만, 대여섯 살 즈음,
울 할매와 사탕할매(동네 살머니)가 얘기하던 중
수많은 화제 가운데 하나로 그 날의 일이 공개된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들이 아니었던 관계로
당근이는 출생을 부정당하고,
아들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날의 일을 당연히 당근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할매의 그 몇마디 얘기는 당근이의 상상 속에서
점점 구체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고
특히 당근이가 자아상을 만들어가던 사춘기 때
내 자아의 어두운 부분으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근이가 여전히 밝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탕할매와 그날의 얘기를 하던 끝에
나더러 들으란 듯이 한 말 한마디 덕분이다.
태어날 때 천대받은 사람은 나중에 귀하게 된다.
대여섯 살, 아무것도 모르던 당근이였지만
본능적으로 이 말을 뇌리에 새겨넣은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태어날 때 엄마한테 버림받은 일은 큰 충격임에 틀림없었고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할매의 말을 주술처럼 믿게 된 것이다.
그래야 살 수가 있었으니까...
실존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이든
기질적으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쪽이든
당근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여섯 살 즈음
엄마를 따라 고모네를 간 적이 있었다.
고모는 결혼한 아들과 같이 살고 있어서
고모네 집에 가면 내 조카벌 되는 고모의 손주들이
서넛 있었다.
고모는 엄마를 따라 온 나를 데리고
슈퍼에 가서 과자를 사 먹고 오라고 손주들에게 돈을 주었다.
슈퍼에는 과자며 빵, 사탕들이 쭉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 조카벌 되는 아이들은 모두 하나씩 골라 들고 서서는
내가 뭔가 하나를 고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고를 수가, 아니
이미 내 눈엔 동그랗게 생긴 카스테라 빵이 들어와 있었는데
손을 뻗어 그것을 집을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그 빵을 집어 들면, 그 아이들이 나를 비웃을 것 같아서였다.
그 다음 장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한참동안 서너명의 조카벌 되는 아이들이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빵과 눈싸움을 했던 것은, 마치 어제 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였는지....
여전히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교대를 졸업한 둘째 언니가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학교로 발령받아서
아주아주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신발깔창 을 생리대로 쓴다는
가난한 여학생의 사연이 온 나라를 서글프게 했는데,
그때도 생리대를 넉넉하게 사서 쓸 수는 없었다.
월요일 아침, 둘째 언니에게 생리대 살 돈을 얻어서
등교길에 있는 가게에 들려 생리대를 하나 샀다.
아침 자습 시간에
같은 반 친구가 절박한 표정으로 내 자리로 왔다.
생리대를 하나만 달라고 했다.
그런 건 미리 준비해야지
그 친구는 공부를 못 했다.
그 친구는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 친구네 집은 우리집보다 가난한 것 같았다.
그 친구는 나와 친하지 않았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무 개가 들어있는 생리대 봉지에서
단 한개를 꺼내 주지 않았다.
이날 이후 10년도 훨씬 더 지나서야, 나는 그 친구에게
정말 큰 잘못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리대 한 개를 주지 못한 이유가
그 친구의 외적인 면이어서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렇지만 그 친구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사과할 방법도 당연히 없었다.
미안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그 친구는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정말 미안했어, YM아.
어디 사는지는 모르지만,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게....
부끄러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는 바로
(자정이 지났으니)그저께의 일이다.
오전에 아들 일로 몹시 낙담한 일이 있었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모임이 있어서
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집 앞 도로는 2차선이고, 모임장소로 가려면
우회전을 해서 4차선 도로를 타야 했다.
하루에도 서너번씩 다니던 그 길이고,
한낮에는 차량 통행도 많지 않은 길이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우회전을 했는데
직진해 오던 차와 그만 접촉사고가 나버렸다.
그 순간, 오전에 쌓였던 감정이 접촉사고로 인해
폭발했는지..... 사고 났을 때의 메뉴얼 따위 개나 줘버리고
상대편 운전자에게
왜, 내 차를, 보지 못 했냐며,
왜, 내 차를, 보고도, 멈추지 않았냐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상대편 운전자는, 아버지벌 되는 어르신이었고
그런 어르신들이 두 분이 더 타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불렀고, 상대편 운전자 어르신은 보험사에 연락했다.
남편이 왔고, 남편이 보험사에 연락을 했다.
나는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내 차를 보고 멈추지 않은 그쪽이 잘못했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보험사 직원이 왔고, 남편은 나에게 상황 설명을 하라고 한 뒤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쳤다.
남편은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더 소리치고 싶었는지 차에 앉아서도 계속 구시렁거렸다.
상황은 약 40분만에 종료되었다.
근처 마트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한 결과
내 과실이 크다고.....................
남편은 별 말 없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억울했는데, 상대편 운전자가
아버지벌 되는 어르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노인들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병원에 드러누우면
어쩔 수 없이 다 물어내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겁도 났지만
무엇보다,
회복적 정의를 전파해야 한다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온갖 척은 다 하고 다니면서
정작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상황에서는
악다구니만 쓴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 보기도 남편 보기도 너무 부끄러워서
무엇보다... 젊은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마음이 좋지 않을 그 어르신에게 부끄러워서
침대에 들어가
부끄러움에 요동치는 심장이 내뿜는 한숨만
푹푹 내질렀다.
아, 이 부끄러움을 어떡하느냐......
어떡하느냐......
어떡하느냐......
사실은 #4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고백합니다.
(진짜 고해성사를 해야 할 성당은 수 개월째 안 나가고 있으면서..... 휴.....ㅜㅜ)
아, 저는 그저께의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알고 보면 동네 어르신일텐데, 공동체 회복을 위해 회복적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공동체를 훼손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ㅜㅜ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ㅜㅜ
저는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이 아니고 보통의 인간이니
딱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졸라 볼까요?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