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나는 스파르타식의 영어 학원을 다녔다. 교과서에 나오는 영어 지문을 통으로 외우게 시켜서 관사 하나라도 틀리면 틀린 개수대로 맞는 그런 학원이었다. 그것도 원장님이 직접 모든 강의실을 돌며 모든 학생들의 손바닥을 효자손으로 챱챱 때리는 기괴한 학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 또한 몹시 게을렀기 때문에 손바닥이 남아나질 않았는데, 딱 한 번. 지문을 정말 완벽하게 외운 적이 있었다. 그 덕에 맞지도 않았고 시험도 굉장히 잘 보았다. 대체 무엇이 게을러터진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답은 바로 ‘빌리 엘리어트’ 다. 당시 영어 교과서에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스크립트가 부분부분 나오는 단원이 있었는데 나는 그 단원을 완벽하게 외운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매우 사소한 것이었다. 교과서에 영화 스크립트가 실려있고, 빌리 엘리어트는 제법 교훈적인 영화이기에 선생님께선 학생들에게 45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영화를 보여주셨다. 앗 수업 대신에 영화를 본다고? 아싸 하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화에 몰입하였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시다시피 45분은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단호하신 선생님은 찝찝하게 영화를 중간에 끊고 나가셨고 아이들은 투정을 부렸지만 뭐 어쩌겠나. 종이 쳤는데. 그렇게 영화는 끊겼고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지게 되는데...
나는 집으로 허겁지겁 뛰어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모 웹하드에 빌리 엘리어트를 재빨리 검색했다. 있다...! 그 시절의 나는 학원에 치여 살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볼 수 없었다. 대신 8기가라는 아기자기한 용량을 가진 엠피쓰리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그 곳에 넣었다. 그리고 밤에 엄마 몰래, 밝기를 줄여가며 영화를 봤다.
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정말 적어도 100번은 봤고 그냥 매일매일 일상처럼 빌리 엘리어트를 보았다. 그 전까지 내게 발레란 유치원 시절 발레복이 입어보고 싶어 수업 신청을 했다가 소리를 지르며 다리 찢은 기억밖에 없었다. 근데 대체 왜 이 영화에 그렇게 빠진걸까. 빌리가 잘생겨서? 빌리가 춤 추는게 좋아서? 마지막 성인 빌리로 나오는 아담 쿠퍼가 잘생겨서? 뭐 모두 틀린 말은 아닌데 이 영화는 더 깊은 무언가가 있다.
영화의 줄거리를 대강 말하자면 발레에 재능있는 소년 빌리가 집안 상황과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발레 학교에 입학해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예전에 이 영화를 볼 땐 빌리밖에 안보였고 빌리를 중점으로 보았다. 근데 나이 들고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빌리의 주변인들, 특히 아빠의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일단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 잉글랜드 북부의 탄광촌으로 장기파업이 한창 진행중인데 빌리의 아버지는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도 빌리를 매일 권투 수업에 보낼 만큼 권투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글로브도 빌리에게 물려주고 없는 돈도 털어가며 권투 수업에 보내고 있는데 아니 이게 웬걸 아들램이 자기 몰래 권투가 아닌 발레를 배우고 있다니! 빌리 아빠는 당연히 노발대발하며 발레 때려치우라 하고 빌리는 시무룩하게 발레를 포기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평범하게 살던 어느 날 빌리 아빠는 빌리가 춤추는 걸 보게 된다. 춤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것 같이 생긴 빌리 아빠가 봐도 빌리는 재능이 있다. 이 때부터 이 아저씨의 행동에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데 먼저 빌리의 재능을 인정한 빌리 아빠는 빌리가 춤을 추는 것이 빌리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로열 발레 스쿨 시험을 보러 가는 데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참여하던 파업을 때려치고 탄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에 탄 사람들을 배신자라 욕하던 아들 토니는 버스에 탄 아버지를 보고 뛰쳐가 아버지를 붙잡는데 이 장면의 대화가 눈물나게 슬프다. 아빠는 이게 빌리를 위한 길이라고 하고 토니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 하며 부둥켜 안고 우는데 이 장면만 보면 항상 짠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둘 다 너무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 죽은 아내의 유품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그것을 팔아돈을 마련한다. 빌리녀석이 아빠의 마음과 희생을 알아야 할텐데... 어쨌든 보면서 빌리의 아빠가 대단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또 나중에 합격 발표가 나고 빌리가 떠나기 전 빌리와 아빠가 장난을 치며 하하호호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도 살짝 울컥한다. 그 전까지 빌리의 아빠는 무뚝뚝하고 성질도 나쁘고 무서운 인물이었는데 그도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걸 보고 굉장히 뭉클했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인데 성인이 된 빌리의 공연을 보러 런던으로 가는 장면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런던의 모던함에 놀라서인지 자신의 아들이 공연을 하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인지 계속 멍때리고 느리게 움직인다. 공연장에 들어가 아들 나오길 기다리는데 그 때의 표정을 보면 내가 다 떨리고 울컥하고 그런다. 그러다 마지막 빌리가 등장하여 도약을 하는데 이 아저씨의 벅찬 표정이 정말 압권이다. 이 영화 볼 때 항상 엔딩만 몇 번을 돌려 볼 정도로 좋아하는 장면이다.
사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윌킨슨씨에 대해서나 빌리에 대해서나. 근데 아빠 얘기만으로 이렇게 구구절절 떠들 줄은 나도 몰랐기에... 워낙 좋아하는 영화다 보니 얘기를 해도해도 끝이 없다. 이 영화를 안봤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 의미가 큰 영화이다. 딱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 영화를 접하여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에 빌리 엘리어트의 스크립트를 실어준 두산김에게 감사하다. 두산김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