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Stoner)] by 존 윌리엄스(John Edward Williams)
삶이 너무 각박해서 내 안에 무언가 자리하고 있었더라도, 그거 한번 꺼내보지도 못하고, 오로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나의 삶, 내 인생이란 것에 대해 눈한번 가늘게 뜨고 잠시 진지해질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가끔은 오랜동안 허망할만큼, 어떨 때는 느닷없이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고레다 히로카즈의 '걸어도걸어도'라는 영화에 보면, 고지식하고 오직 한길만 살아온 늙은 아버지가 문득문득 자신도 모르게 즐겨 부르는 노래가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라는 사실이, 슬금슬금 관객들에게 다가와 박힌다. 평생 취미생활 하나 없이 공무원 관리로 생업에만 종사하며 살아온 나이드신 아버지의 생파에 갔다가 아버지가 줄곧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는데, 그 노래가 김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라고 한다면 이해가 빠를듯하다.
그 유행가들을 비하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잘 내보이지 않는, 그것이 Guilty pleasure 로서의 부끄러움이든 아니든, 내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그러한 소소함이, 사실은 나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범주로 놓고 봤을 때, 생각보다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생각도 못할만큼 엄청나게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큰 부분일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많은 개인들은 내가 알고 남이 아는 부분만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인생의 초기에 운 좋게도, 그 어렴풋함을 뚜렷함으로 발전시켜, 세상에서 유용하여 지금까지도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가끔 천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토너]는, 자기도 모르는 자아를, 우연하게, 아주 강렬하게 발견한 후에, 그간의 삶 자체를 송두리채 변화시키며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스토너'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아가는'이 아니라, '살아내는'이라 표현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그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세속적이고, 사람들은 그가 변화되기 전에 대하던 사람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너의 숨은 자아는, 셰익스피어의 '쏘네트'에 진지하게 반응 함으로써 발견된다. 그리고 그는 농부가 아닌 문학도로서의 길을 택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그를 척박한 농토에서 끌어내 주었고,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도 대학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으며, 대학 내에서의 정치싸움에는 무심하게 만들고, 대세에 따라 용인하는 대신, 문학과 그의 연구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는 '악'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의 호전적인 모습을 끌어내 주었다.
그리고 너무도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와의 관계를, 독자들까지도 그 깊은 애정에 젖어들게 하고서는, 무심하리만치 관조하게 했고, 그와 같이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젊은 강사 캐서린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끼고, 그것에 빠져들게 했다. 그에게 있어 책과 강의, 대학과 연구, 학생과 토론은 그 속에서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스토너의 성역이었다.
이 책은 무려 50년 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많은 리뷰어들이 이야기하듯, 전혀 촌스럽거나 시대 착오적이지가 않다. 인물들은 입체적이며, 그들에 대한 묘사나 표현 방식 또한 세련되고 유려하다.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명징하게, 그들에 대한 심리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며 진한 감동을 준다.
신파적인 요소는 전혀 없는데도, 평범한 인물들과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사건들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절제된 표현과 서사를 통해서 하염없이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전형적인 선한 주인공과 전형적인 악인이 등장하지만, 그 악인들조차도 관계에서 오는 악역이 있을 뿐이지, 그 인물 자체는 전혀 악인일 수가 없도록, 마치 우리 사는 이 곳에서와 같이, 대부분의 인물들이 묘사가 된다(그럼에도, 진짜 나쁜놈은 있다, 우리 사는 이곳과도 같이).
[스토너]는 스토너라는 한 인물의 청소년 시기부터 그가 사망하는 60대 전후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지만, 또한 그가 살아가며 가지는 모든 "관계"에 대한 책이다.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곧 실패를 절감하는 결혼 생활에의, 아내 이디스와의 관계, 그리고 너무도 사랑하는 딸이지만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아내와의 관계에 의해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딸 그레이스와의 관계, 생의 조건이라 말할 수 있는, 어떤 악인들 과의 어쩔 수 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관계, 그리고 그가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여인 캐서린과의 관계까지...
[스토너]는 한 개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 삶 속에 우리 자신들의 삶 또한 담겨 있으며, 그 삶을 살며 고군 분투하는, 혹은 관망하는 스토너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없거나 한번도 가진 적이 없는 '열정에 대한 애정'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너무 좋은 소설이므로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