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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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원리에서 죽음충동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인간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의식이야 곧바로 명석판명하게 이해되지만—데카르트의 표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처럼—무의식의 존재는 어떻게 추론된단 말인가? 『꿈의 해석』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에 대해 프로이트가 내놓은 대답은 <꿈>이었습니다. 꿈을 설계해서 만들어내고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무슨 영화 <인셉션(Inception)>(2010)도 아니고 말이죠(심지어 이 영화 안에서도 꿈을 완전히 통제하진 못하잖습니까?). 꿈이란 마치 <시계태엽 오렌지>의 루도비코 요법(Ludovico Technique)처럼 극장에 강제로 앉혀진 채로—또한 눈꺼풀을 강제로 올리게 한 뒤에—원치 않는 영화를 봐야만 하는 상황과도 같죠. 운이 좋으면 이상형과 황홀한 잠자리를 가지며 몽정(夢精)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운이 나쁘다면 그로테스크한 악몽(惡夢)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 둘, 프레디가 다가온다. 셋, 넷, 대문을 잠가라. 다섯, 여섯, 십자가를 가슴에. 일곱, 여덟, 늦게까지 깨어있어라. 아홉, 열, 잠들지 말고…….」1

어쨌거나 꿈은 통제할 수 없으므로—명색에 계몽주의의 시대인데 꿈을 하나님의 은밀한 방문으로 해석할 순 없으므로—여기에 붙일 명칭을 고안해내야만 했죠. 그리고 거기에 프로이트가 붙인 이름이 바로 <무의식>이었습니다. 문제는 프로이트가 이런 무의식에 강한 무게를 싣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누군가를 살해하는 꿈을 꿨다고 가정해봅시다. 무의식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던 시절엔 <그냥 개꿈이네>라고 치부하고서 잊어버릴 부분이었지만, 프로이트는 이걸 은밀한 소망, 즉 심적 진실로서 해석하고자 했습니다.2

꿈에서 되풀이되는 불쾌한 감정이 소원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소원, 자신에게도 고백하고 싶지 않은 소원이 있기 마련이다.3

이렇게 프로이트가 무의식이 은밀한 진실임을 주장하면서부터 여러 문제가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칸트 이후로 사람들은 인간을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존재로 봤는데, 이런 자존심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음은 물론이고, 만일 무의식에 무게중심이 있다면 대관절 지금의 문명질서가 어떻게 가능했겠느냐는 항변들도 이어졌죠(물론 프로이트 이후 온갖 참상으로 얼룩진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이런 반박들이 궁색해져 버렸지만……).

전자는 반박할 가치가 없는 한낱 입장에 불과했지만, 후자의 반박은 충분히 대답할 만한 했으므로 여기에 프로이트는 이성과 현실원리(Realitätsprinzip)를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생존하기 위해 의식이 무의식을 통제하면서 문명질서를 이룩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는 설명(무의식이 마음대로 날뛰었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겠죠?).4 이처럼—적어도 전기까지는—프로이트는 <자기 보존 충동(Selbsterhaltungstridb)>을 공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꿈의 해석』에서 실제로 프로이트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날뛰려는 무의식이 아니라, 그걸 통제해보려는 의식이었죠. 좀 더 정확히는 검열관으로서의 의식 말입니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 프로이트는 인간정신을 완벽히 포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정신분석이 정신세계를 정복한 것처럼 보였죠! 그렇지만 세상사가 마냥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닌 법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로이트는 여태껏 개진해온 정신분석의 임상사례로 이해하기 어려운 증상과 마주하게 됐는데, 그건 바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귀환병들이 겪던 기묘한 환각의 반복, 즉 현대정신의학 용어로 PTSD였습니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일상생활로 돌아왔음에도 폭탄이 터지는 소리나 난도질당한 시체에 대한 환각을 반복해서 겪는 증상들. 앞서 얘기한 강간부터 살인까지의 범죄적인 욕망들이야 어떻게든 쾌락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지만, PTSD에 해당하는 증상들은 정말이지 쾌락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힘들었죠—고통뿐인 욕망이라?

결국 프로이트는 1920년 문제적 논문이 된—이 때문에 과학계에서 영구히 퇴출당하게 된—「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종래에 설명되어온 성충동인 리비도를 넘어서는 <죽음충동(Todestrieb)>을 인정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의 목표는 죽음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서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생명 없는 것이 생명체보다 먼저 존재한다.5

이로써 무의식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추구하는 것 같기도 한 검은 우주가 돼버렸습니다. 물론 쾌락(욕망)과 죽음은 근친관계입니다. 이를테면 <A를 가질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라거나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말을 떠올려 봅시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종결되는 것은 아닙니다(사실 구체적으로 설명된 것은 딱히 없죠). 단적으로 물어서, 욕망 앞에 죽음은 무릅써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그런 욕망을 미끼로 해서 진정으로 추구되는 것은 죽음인 걸까요? 아마도 이건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여기서 확실한 것은, 이제부터 무의식은 더 이상 쾌락원칙에 국한되지 않는 무언가가 됐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증오와 사랑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말았죠.

이만 마칩니다. 총총.

※사족(蛇足). 정신분석의 인간정신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는 모호한 이원론입니다. 여기에 <모호한>이란 형용사를 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즉 자유의지와 인식의 관점 때문입니다. 우선 무의식에 무게를 실어서 의식이 무의식의 지배를 당한다고 본다면—자유의지가 허상이란 의미에서—인간정신은 무의식이란 전체집합 안에 의식을 부분집합으로 갖는 일원론이 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인식에 무게를 둔다면, 어쨌거나 그런 무의식이 번역되고 나타나는 공간이 의식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은 한낱 유령 같은 것이 됩니다.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 환원되는 한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면, 그런 무의식을 인간정신의 독립적인 축이라고 설정하는 것 자체가 월권행위가 되겠지요. 마치 영적 세계가 허구인 것처럼 말입니다(그건 소설일 뿐이야!).

  1. 영화 <나이트 메어>(1984)에서 살인자이자 악마인 프레디(Freddy Krueger)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노래.
  2. 참고로 훗날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 저 <소망>을 <욕망(désir)>이란 용어로 바꿔버리게 됩니다.
  3. 지그문트 프로이트·김인순 역, 『꿈의 해석』(열린책들, 2004), 206쪽.
  4. 지그문트 프로이트·김석희 역, 『문명 속의 불만』(열린책들, 2003), 174-175쪽.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 진보 가운데 하나를 당장 지적할 수 있다. 외부의 강제가 차츰 내면화하는 과정은 인간의 발달 과정과 보조를 같이 한다. 독자적인 정신 기능인 인간의 초자아(超自我)가 그 강제를 외부에서 이어받아, 그것을 자신의 명령 속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변화 과정을 모든 어린아이한테서 관찰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어린아이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가 된다. 초자아의 강화는 심리학적 영역에서 가장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5. 지그문트 프로이트·강영계 역, 『쾌락원리의 저편』(지만지, 2009),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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