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화
봉사활동이 있은 후로 태식은 문희와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태식은 문희와의 인연이 숙명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어느덧 태식은 자신의 집보다는 문희의 집이 있는 화안동에 가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그것은 문희가 퇴근 후에 만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문희의 집 쪽으로 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희는 태식을 만나면서도 늘 불안 해 했다. 노성마비인 오빠와 거동이 편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늘 퇴근 후에 오빠와 어머니의 저녁식사를 먼저 챙겨주고 나서야 태식을 만날 수 있었던 문희는 태식에게 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태식과 문희가 만나는 시간이라야 저녁식사 후 겨우 한 두 시간이었지만 태식과 문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다려지는 시간이었고 헤어질 때면 영원히 못 볼 것처럼 아쉬워하며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헤어져야 했다.
거리마다 즐비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는 벌써 잎이 노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 태식은 평일에는 시청 앞에 조그마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수산물 중계를 하고 있는 회사는 늘 분주했지만 보수는 다른 곳에서 일하는 곳 보다 훨씬 좋았다. 태식은 그곳에서 번역 업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일본에서 팩스로 들어 온 갖가지 서류들을 번역하여 다시 워드로 정리해 놓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태식은 다른 날 보다 많지 않은 번역 업무를 끝내고 퇴근을 서둘렀다.
“어이, 김 대리! 거 요즘 너무 일찍 퇴근하는 것 아냐? 뭐 좋은 일 있어?”
가방을 챙기는 태식을 보며 뒤에 있던 정 상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기다리기라도 했듯 뒤에서 경리를 보고 있던 미영씨가 “요즘 김 대리님 연예하는 것 같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가 오는걸요?”라며 거들고 나섰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태식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태식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머리를 긁으며 뒤돌아 본 태식은 먼저 퇴근하겠다는 말을 겨우 하고 돌아서 문을 열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왔다.
태식은 먼저 근처에 있는 대형 슈퍼에 들렀다. 바구니를 든 태식은 반찬거리며 간식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문희가 퇴근하기 전에 문희의 집으로 먼저 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직 한 번도 문희의 집에 들어 간적은 없었지만 대문 앞에서 몇 번 문희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낯설지는 않았다.
어느새 바구니가 가득 차 있었고 태식은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빠져나와 화안동 쪽으로 차를 몰았다.
추석 전이어서 그런지 거리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간혹 교통이 정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태식이 문희의 집 대문 앞에서 방 안의 어머니에게 들릴 수 있을 만큼 크게 소리쳤다.
“누구시오?”
방문을 열며 문희의 어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예, 저 김태식입니다.”
문희의 어머니는 무척 허약한 분이었다. 보기에도 비쩍 말라 있었고 오랫동안 외출을 안 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피부가 하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유난히 하얀 피부에 어깨에 닿을 듯한 생머리를 한 손으로 뒤로 넘기며 태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문희 올려면 아직 멀었는데?”
“예, 알고 있습니다. 그냥 집에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뭐, 안될 것도 없지만 워낙 누추해서…”
“괜찮습니다. 그런 것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것 저…”
“이게 뭐요?”
“저, 오는 길에 슈퍼에 일 때문에 들어갔다가 찬거리하고 간식거리 좀 사왔습니다.”
“아이고, 그냥 오면 뭘 어떻다고 이런 걸 다 사와.”
문희의 어머니는 별안간 태식이 좁은 마루에 내려놓은 큰 봉투 안을 살피더니 남자가 곰살 맞게 이런 걸 다 사왔느냐고 하며 일일이 마루에 진열이라도 하듯 꺼내 놓았다.
태식은 마루에 걸터앉아 열려진 방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문희의 오빠 문석이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먹던 밥그릇이 쟁반에 올려 진 채 오빠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비교적 방안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열려진 방문 정면으로 문희의 것으로 보이는 화장대가 놓여 있었고 화장대에는 몇 개의 화장품만 덩그러니 올려 져 있었다. 화장대 위 한 쪽으로는 조그마한 액자에 넣어진 가족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워낙 대접 할게 없어서…”
문희의 어머니는 불편한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는 어느새 부엌에서 가져 온 컵에 태식이 사온 쥬스를 가득 따라서 내밀었다.
“아녜요, 불편해 하지 마세요.”
“그래, 우리 문희를 어떻게 생각해?”
“네?”
“휴, 우리 문희가 못난 엄마하고 오빠 먹여 살리려고 혼자 등골이 빠지지,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이렇게 까지 힘들지 않았는데.”
“아 네, 그래도 문희씨 보면 그런 기색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지 마음이야 오죽 하겠어?”
쥬스를 받아 든 태식이 채 마시기도 전에 문희의 어머니는 태식에게 신세라도 한탄하듯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문희랑 결혼할 생각인가?”
어느새 문희 어머니는 태식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벌써 사귄지 몇 달이 흐른 것을 알고 있는 문희의 어머니는 태식의 의중을 은연중 떠보고 싶은 생각인 듯 했다.
“어머, 태식씨! 혼자 집에까지 웬일로…”
태식이 문희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대문을 열고 문희가 들어왔다.
“그냥, 퇴근길에 오빠랑 어머니 드실 찬거리하고 간식거리 좀 사다드리려고 들렸지 뭐.”
태식은 마치 일어서서 가려던 사람처럼 엉거주춤 일어서서 문희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집에까지 찾아 온 태식의 행동에 혹시라도 문희가 기분 상해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불쑥 찾아 들었다.
“야야, 문희야! 글쎄 이 사람이 이걸 다 나 먹으라고 사왔다.”
문희의 어머니가 순간 어색한 분위기를 덮기라도 하듯 태식을 거들고 나서며 마루에 놓여 진 물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참, 자꾸 집에 놀러 오고 싶다기에 다음에 오라고 미루었더니 아예 상의도 없이 불쑥 찾아 왔네요? 어차피 처음부터 집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미안해, 불쑥 찾아와서…”
태식은 민망한 마음에 빙긋 웃으며 문희를 바라보았다.
“으이그, 그 급한 성격 아무도 못 말린다니깐. 왔으니 우리 엄마랑 오빠한테 정식으로 인사하고 같이 저녁 먹고 가요.”
“그래라 그래! 그러면 좋겠네.”
문희 말에 문희 어머니도 기다렸다는 듯이 태식에게 말했다.
“이거, 폐를 끼쳐서…”
“알긴 알아요? 뭐 이미 폐를 끼쳤으니 뭐로 보상할래요?”
문희는 마루에 놓인 물건들을 다시 봉투에 담으며 태식을 돌아보고 웃었다.
그날, 태식은 문희의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결혼할 때까지 변치 않고 문희를 사랑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주 놀러 오겠다는 말 또한 잊지 않고 했다. 잠이 깬 문희의 오빠도 잘 나오지 않는 말을 힘겹게 하며 반갑다는 말과 함께 문희가 참 예쁘다는 말을 반복해서 하곤 했다.
태식은 처음으로 문희가 직접 지은 밥과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한사코 자신의 밥을 덜어 주는 문희의 어머니는 무슨 일인지 간혹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