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화
태식은 불안했다. 문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가슴이 채 한 것처럼 답답해져 왔다. 집으로 돌아 온 태식은 입회원서에서 옮겨 적어 놓았던 문희의 집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반복했을 뿐 차마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할 수 없었다.
태식은 수첩을 덮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일단 토요일 봉사활동 시간을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태식은 토요일이 되기까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문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엄습해와 견딜 수 없었다.
태식은 토요일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해 졌다.
20여 명의 근육병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한 교회에서 봉사활동이 있는 날이었기에 모일 인원을 점검하고 그에 맞게 청소, 빨래, 식사, 돌봄의 역할을 미리 분류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태식은 문희를 자신과 같은 역할로 분류해 놓았다. 태식은 환자를 직접 돌보는 역할을 맡아 오고 있었다. 물론, 신입들은 환자가 답답해하는 부분을 긁어 주고 대소변을 받아주는 등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많은 훈련과 적응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동안 뇌성마비 오빠를 돌보아 온 터라 무난히 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것보다도 일단 태식은 문희를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다.
회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좁은 사무실엔 회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봉사활동이 숙달된 그들은 환자들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둘러보았지만 아직 문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태식은 모든 회원들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유하고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근육병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문영동 참사랑교회로 봉사활동을 나가게 됩니다. 들풀회 티셔츠를 입고 오지않은 회원들께서는 다음부턴 꼭 입고 오시기 바랍니다. 근육병 환자들은 근육이 퇴화되어 자기 스스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밥까지 여러분들이 일일이 떠 먹여 주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근육병 환자들의 연령층은 대부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입니다. 주로 7세 이후 발병하여 지금껏 누워서만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그들을 대하실 때 환자라는 생각을 버리시고 친구처럼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식은 그 외에도 미리 분류 작업을 해 놓았던 역할을 일러 주었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태식이 출발을 알리고 순식간에 많은 인원들이 좁은 계단을 통해 사무실을 빠져 나가고 태식도 몇 가지 서류들과 카메라를 들고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문을 잠그던 태식의 등 뒤에서 조용하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분명 문희였다.
“미안하긴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태식과 문희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서 가시죠. 이미 봉사버스가 출발했으니 제 차로 가셔야 할 것 같네요.”
봉사 버스는 근처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출퇴근용 차량을 토요일마다 지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들풀회로서는 매우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터였다.
“저, 죄송합니다.”
차의 시동을 걸고 문영동으로 가기 위해 시청 사거리로 방향을 잡은 태식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늘 지갑을 드려도 되는 건데 그만 빨리 돌려주려고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마음 쓰시지 마세요. 간사님께 괜히 초라한 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속상한 마음에….”
문희의 목소리는 비교적 차분했고 곱게 빗어 내린 단발머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뺨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처음 봉사활동을 나가면 많이 힘들어 하던데 힘드시지 않겠어요?”
태식은 그녀의 지갑에 기록된 일기에서 이미 그녀가 오빠를 돌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짐짓 모른 척 문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치, 다 보았으면서 시치미 떼지 마세요. 저희 오빠가 뇌성마비 일급 장애인이에요. 그래서 장애인들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그렇게 마음에 부담감도 없어요.”
애써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눈이 맑았다. 태식은 마치 숨겨두었던 마음을 들켜 버린 것처럼 겸연쩍게 머리를 긁었다.
“하하, 죄송해요. 처음부터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문희와 이야기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문영동 참사랑교회에 도착하게 되었다. 먼저 온 버스에서는 회원들이 내려서 줄을 서 있었고 이민석 회장을 비롯한 몇 몇은 준비해 온 간식을 들어 내리고 있었다.
“야, 이거 벌써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워 진 거예요?”
모른 척 하고 지나갔으면 좋았을 법 한 대도 차에서 내리는 태식과 문희를 바라보며 이민석 회장은 회원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참, 회장님도 문희씨가 늦는 바람에 제 차로 함께 온 겁니다.”
태식은 많은 회원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 것 같아 몸들 바를 몰랐고 문희는 이미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회원들 뒤편에 숨어 있었다.